2023.03.24(금)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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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새벽이면 깊은 샘에서 첫 물을 정화수로 올리고 무등산을 향해 지성으로 기도하셨다. 그 기도는 자손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동네 사람들이 물을 길어가기 전에 첫 물을 올려야 마음이 하늘에 닿는 거야.” 할머니의 말씀이 그땐 잘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반복된 일이라 아직도 생생하다. 우물은 그렇게 신성한 것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우물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작두펌프가 박혔다. 오빠는 작두에 올라타고 펌프질을 했고 맑은 물이 콸콸 나오는 게 재밌어서 자꾸 퍼 올렸다. 동네에서도 물을 길어가기 편한 작두가 박히자, 그 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물을 길어갔다.
어느 날 펌프는 아침이면 말라서 헛손질만 하게 됐고, 엄마는 마중물을 떠오셨다. 물을 끌어 올리려면 한 두 바가지의 마중물을 붓고 펌프질을 하면 깊은 땅속 물을 마중물이 한없이 끌고 올라왔다. 마중물은 그렇게 힘들 때, 내재된 무한한 가능성을 이끌어 내는 우리 삶을 살리는 물이다.
코로나19로 생활이 어려워진 예술인들이 주변에 더 많아졌다. 국가프로젝트에 참여하지 못한 예술가들은 작업을 포기하고 시간제 돈벌이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며 견디고 있다. 아예 그림을 포기한 친구들도 있다.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작가로 전시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그림을 그릴 의욕을 상실한 젊은 작가들도 많다. 어떤 작가는 요즘 도배와 페인트칠을 하며 살아간다며 팔리지도 않는데 그림을 계속 그릴 수가 없다고 했다. 극 소수의 작가들만 바쁘게 불려다니며 전시도 하고 잘 팔린다.
1995년부터 광주비엔날레가 열리고,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도심 한복판에 자리를 잡았지만, 광주에서 활동하는 미술인은 여전히 생계가 어렵다.
“갤러리생각상자에서 미술인들에게 마중물이 되는 전시를 해볼까요?” 이 제안으로 ‘종이와 사람들’ 조상권 대표, 광주아트가이드 서동환 대표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서로 마중물이 되는 전시로 작가와 미술애호가를 연결하는 전시를 준비했다.
마중물 전시는 10호 이내 소품으로 준비했다. 집에서 감상할 수 있는 작품들을 전시해서 미술품을 사랑하는 시민들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소장할 수 있고, 작가들은 창작할 수 있는 힘을 얻는 서로에게 마중물이 되는 기획이다. 목마른 현실에서 마음을 나누는 장에 작가들과 미술을 사랑하는 시민들을 모신다고 하자, 서른여덟 명의 화가들이 자발적으로 두 점씩 소품을 내서 참여하게 됐고, 작품을 구입할 수 있는 주변의 지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광주시민들은 남다른 마음이 있다. 어려울 때 연대하고 도움을 주는 따뜻한 사람들이 많다.
마중물 전시는 준비과정부터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청년작가들로만 구성하려고 했는데, 중견작가들이 함께 참여해 젊은 작가들도 만나고 서로 도움이 되자고 한 것이다. 선한 의지가 모이며 전시 시작 전부터 작품이 미리 팔리기 시작했다.
오픈식에 광산구청에서는 화환 대신 청년작가들에게 응원 메시지를 담아 오월주먹빵 70개를 보내주었고, 작품을 구매한 사람들은 대부분 월급으로 생활하는 시민들이었으며, 좋은 그림을 소장하게 되어 행운이라고 말했다. 그림 그리는 것이 두렵다면서 한 점만 출품한 재능있는 청년작가는 작품은 내년 전시에 작품을 미리 예약하기도 했다.
우리는 특별한 경험을 공유하게 됐다. 광주는 어려울 때 돕는 마중물의 도시라는 것이다. 오월 광주정신도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마중물이었듯이 예술계의 마중물 역할을 해 줄 광주시민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할머니의 정화수처럼, 엄마의 마중물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마중물이 되어주며 코로나19로 어려운 시절을 이겨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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