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03(토) 15:09
|
갈맷빛 등성이에 흰 눈을 얹고 철인처럼 의연히 시가(市街)를 내려다보고 서 있는 그를 만나는 날은 나도 무언지 깊은 상념 속으로 빠져들었고, 은빛 햇살을 지느러미처럼 반짝이며 행복에 젖어있는 날엔 나도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설렘으로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늘은 회색빛 짙은 하늘 아래 그는 돌아앉아 있다. 무엇이 그를 화나게 했을까?
이곳저곳에서 종일 펑펑 터지는 최루탄 가스에 속이 상했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사 배를 곯든 말든, 외제 차에 외제 가구, 외제 음식물까지 온통 외제 일색으로 돈을 물 쓰듯 하는 분별력 없는 사람들의 작태에 그만 눈을 감고 싶었을까? 물질에 홀려, 이기심에 젖어 본성을 잃고 양심을 저당 잡히고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 그를 돌아앉게 했는지 모르겠다.
버스를 타면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그를 찾아 나서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늘 먼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그리워한다. 일상에 지쳐 숨이 막히는 날 그를 바라보면 그는 종마(種馬)의 등 같은 널찍한 등을 내어준다. 그리고 투정 부리는 아이를 다독이는 엄마처럼 가만가만 내 울화를 잠재운다.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내 답답함을, 울혈을 다 풀어낼 수 없는 날, 그를 찾아 나선다. 아무리 오랜만이어도 그는 투정이 없다. 수다스러운 인사말도, 나무람의 말도 없이 묵묵히 나를 반겨준다. 만산홍엽 진달래로, 용추계곡 물소리로, 새인봉 메아리로, 그는 철 따라 나날이 다른 모습으로 내게 말하고 위로한다. 어떤 날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갈대밭의 물살에 몸을 맡기기도 하고, 어떤 날은 백설 분 날리는 설국의 여왕이 되어 그 품속에 놀다가 돌아온다. 그렇게 그의 가슴팍을 헤집다 돌아온 날은 나를 무던히도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고질병인 불면증에서도 외로움에서도 헤어날 수 있다.
서석대 절벽 아래 고고하게 피어난 들국화의 의지를 가슴에 묻혀오던 날, 내 연약함이 부끄러워 융단처럼 깔린 솔잎 위에 묻힌 듯 드러누웠다. 갈바람이 실어다 준 그윽한 솔향에 취해 하산하는 길에 자꾸만 콧노래가 나왔다. 용추계곡 폭포수 아래 서면 오욕칠정으로 얼룩진 내 뒤틀린 심사들을 깨끗이 씻어 내고 싶어진다. 선녀라도 내려올 듯하여 올려다본 하늘엔 동아줄은 안 보이고 무심한 구름만이 한가롭게 흐르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그곳에 전설처럼 서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변함없이 나의 말벗이 되고 내 마음의 든든한 의지처가 되었다. 어떤 때는 가슴이 따뜻하여 아무 말이나 다 쏟고 싶은 소탈한 친구로, 그리고 어떤 때는 그리운 연인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아들 녀석을 떼어놓고 먹먹한 심사로 막차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는 길에 변함없이 마중 나와 있는 그를 보았다.
2월 보름께 달빛에 쪽빛 무명베 치마의 엄니로 서서 그는
“내 새끼!”
하며 두 팔을 벌려 나를 안았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 내내 거북살스럽게 틀어 올랐던 울먹임이 ‘흑’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를 더 넓은 세상으로 보냄을 기뻐해야지.”
그는 나를 다독이며 위로했다.
온통 길바닥은 선전용 팜플렛으로 가득하고, 뒹구는 종이쪽보다 더 많은 날조된 공약들이 독가스보다 더 지독한 공해로 떠도는 요즈음. 세상은 자욱한 안개로 답답해 견딜 수가 없다.
무심히 그곳을 향한 내 시야에 그가 없었다. 내 눈 탓이려니.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그는 거기 없었다. 자욱한 안개인가 매연인가 그것만이 그가 있던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덜컹한 심사.
그는 어디로 갔을까? 무엇이 그를 그렇게 떠나게 했을까? 인간들의 하는 짓들이 너무 답답하여 하루쯤 훌쩍 여행을 떠난 것일까?
자고 나면 그는 돌아와 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천근인 듯 무거웠다.
그가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위로받고 살 것인가?
그가 있기에 내가 여기 머물고, 그가 있기에 내가 여기를 떠날 수 없다.
무등산!
정말 그대를 사랑한다.
<김정화 약력>
▲ 광주문인협회 회원
▲ 월간문학 회원
▲ 수상 : 광주문학상, 신곡문학상 수상
▲ 작품집 : ‘왜 우리에게 도돌이표는 없는가’, ‘우리는 무엇에 길들여 사는가’
|
김정화 님의 수필 ‘무등산’에서의 서술자는 무등산을 마치 어머니처럼 바라보고 대화하고 위로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마음이 답답할 때 무등산에 가면 후련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머니처럼 산이 품어 줘서일 것이다. 무등산은 봄에는 꿈을 향해 다시 열정의 꽃을 피워 보라며 응원해 주고, 여름에는 잠시 그늘의자에 앉아 쉬었다 가라며 곁을 내주고, 가을에는 울긋불긋 자신의 색깔대로 살아가라며 격려해 주고, 겨울에는 침묵 속으로 들어가 내 자신과 대화해 보라며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게 해준다. 어머니처럼 넉넉히 품어 주고 다독여 주는 그 무등산이 있기에 광주의 시민들은 행복한 것이다. 이 수필은 그런 무등산의 넉넉한 품성을 어머니와 중첩시켜 잘 풀어내 주고 있다. 일과 후 언제나 변함없이 마중 나와 있는 산, 늘 설렘으로 발걸음이 가벼워지게 하는 산, 때론 최루탄 가스에 속이 상해 돌아앉는 산, 일상에 지쳐 숨 막히는 날엔 엄마처럼 울화를 잠재워 주는 산, 간혹 산행할 땐 묵묵히 반겨 주는 산, 고질병인 불면증과 외로움에서 헤어나게 해주는 산, 언제나 한곳에 전설처럼 서 있는 산, 때론 말벗이나 의지처나 소탈한 친구나 그리운 연인으로 다가오는 산, 아들과 헤어져 귀가할 땐 무명베 치마 입은 엄니로 서서 위로해 주는 산, 매연이 심할 땐 잠시 종적을 감췄다가 돌아오는 산, 이런 무등산을 서술자는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 고백이 진솔하여, 잔잔한 감동을 준다. 수필의 특질을 두루 갖추면서, 시대를 진단하고 내려다보며, 위로하여, 나아갈 방향까지 은은히 제시해 주는 수필, 이런 수필이 우리 곁에 있어 참 행복하다.
<평설=박덕은 문학평론가>
▶ 디지털 뉴스 콘텐츠 이용규칙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