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삿짐 트럭이 적색 신호등에 걸려 건널목 앞에 멈춰 선다. 나도 걸음을 멈추고 그 옆에 선다. 크고 작은 종이 상자에 담기기도 하고 보자기에 묶이기도 한, 더러는 알몸인 채 끌려 나오다시피 짐칸에 실린 세간들이 눈길을 붙잡는다. 앞자리에 앉은 중년 여인의 표정은 심란하지만, 짐칸 한 귀퉁이에 실린 키 큰 열대 나무는 이는 바람꽃을 타고 잎을 흔들어 댄다.

가재도구는 왜 대문 밖으로 나서면 저리도 쓸쓸하고 초라해 보이는 것일까. 집안 구석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는 칠 벗겨진 모서리까지도 정답고 아늑한데, 거리로 내몰린 순간 남루의 옷을 입은 것처럼 구차한 풍경이 되고 마는 것일까. 손때 묻은 윤기는 그런대로 괜찮지만 구겨진 일상까지 후줄근하게 얼비치는 것만 같다. ‘거리에 나앉게 생겼다.’라는 느낌이 저절로 들 만큼 이삿짐 보따리 근처에는 무늬 그늘이 내리고 까닭 모를 서늘함이 스쳐 가곤 한다.

우리 삶이 어찌 이와 다르랴. 길든 생활, 익숙한 가족, 친한 친구, 손발이 잘 맞는 일터, 무던한 동료, 이 모두가 서로 적당한 관계를 맺으며 관계의 의미망 속 어느 지점쯤에 나의 주소, 나의 집, 나의 방, 나의 자리가 똬리를 틀고 있던 게 아닌가. 그 공간, 그 낯익고 정다운 공간 속에서 우리는 자고 깨고 웃고 울고 사랑하고 다투며 살아간다. 이 익숙한 공간 속의 무심한 안도감을 우린 ‘습관’이라 부르고 이 습관은 네 개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속에 먼지가 앉고 곰팡이가 슬기도 하지만, 때론 볕이 들고 별이 찾아오기도 한다. 곤고한 삶일지언정 밖의 비바람으로부터 보호된 안온한 휴식이 담기기도 한다. 이런 삶의 무대장치가 습관처럼 평온함에 머물러 있을 때 사람들은 지루한 하품을 베어 물면서도 이를 행복이라 호명하며 흐뭇해한다. 하여 스스로 구축한 사각의 무대장치들이 대문 밖의 남루한 이삿짐 보퉁이가 되지 않도록 지키고자 사력을 다해 애쓰며 발버둥 친다.

이런 무대장치를 타의에 의해서 허물어야 하는 서민들에게 이사는 삶의 혁명이다. 새집, 새로 지은 집, 더 큰 집으로 이사 가는 이들도 있지만 셋집을 전전하는 과정에서 이 삶의 혁명을 무참하게 감내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랑하는 부부의 단란하던 삶이 어느 날 갑자기 바스러져 버리는 예도 있다. 전세대란(傳貰大亂)에 떠밀려 다니다가 서로 무능과 가난함을 탓하며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갈라서는 서러움도 목도 한다. 지상의 방 한 칸이 천상의 사랑보다 더 귀한 것이 되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사각의 무대와 먹을거리가 어찌 서민들에게 호락호락한 일이랴. 장자는 뱁새가 깊은 숲속을 자유로이 휘젓고 다녀도 쉴 곳은 나뭇가지 하나면 충분하고, 두더지가 강물을 마셔도 그 배만 채우면 그만이라고 했지만, 어떤 필부들에겐 삶의 공간이란 연극의 무대장치일 수도 있다.

엄혹했던 그 시절,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박종철 군의 하숙방을 잊을 수가 없다.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그는 군부 독재 시절 하숙집에서 수사관들에 의해 영장 없이 불법으로 강제 연행되었으나 결국 자신의 사각 틀 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가 밖으로 불려 나간 후 비어있었던 그 사각의 하숙방을 카메라는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벽에 기대어 놓여있는 책상과 의자, 책상 위에 꽂힌 책들, 희끄무레한 꽃무늬의 벽지, 비닐 장판……. 그의 소소한 삶의 무대장치들……. 그러나 사각의 무대장치는 다시는 그를 보호할 수 있는 공간이 되지 못했다. TV 속 아나운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삶을 너무나도 웅변적인 목소리로 말해 주고 있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 깊고 아픈 상처인 그를 떠올리면 아늑한 삶과 젊음과 번민들이 피고 졌을 그의 방을 담은 필름이 내 머릿속에서 문득문득 휘몰아치곤 한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안경 쓴 그 젊은이를 상상해 본다. 그는 담배를 피운다. 책을 읽다 말고 창밖의 소소한 일상을 바라본다. 가볍게 휘파람도 분다. 그 방에 이불을 펴고 반듯이 누워 팔베개하고 생각에 잠겼다가 모로 누워 잠든다. 한 줌 햇볕이 달려와 그의 이마를 짚는다. 하나 그는 이미 방 밖으로 끌려 나가서 이삿짐도 되질 못 하고 산산이 해체되고 말았다. 나도 그 옆에 누워 내 삶의 무대장치를 점검한다.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여러 번 이삿짐 트럭에 실려 이 주소 저 주소, 이 집 저 집, 이 방 저 방을 전전하여 여기 이 자리에 당도하였는가. 삶의 무대장치가 가장 빈번하게 해체되고 다시 조립될 때는 어느 때였는가. 내 이삿짐 역시 늘 쓸쓸하고 초라했지만 벌거벗은 삶의 진실을 손가락질해 알려주는 미덕이 있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남루한 이삿짐은 내 꿈을 깨트리기도 했지만 헛된 오만과 부질없는 확신으로부터 해방해 주기도 했다.

신호가 바뀌자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늘은 비를 잔뜩 머금고 있는데 키 큰 열대 나무는 트럭의 가속에 저 혼자 신이 난 듯 허리가 휘도록 잎을 흔들어 댄다. 점점 거세지는 바람. 창밖으로 나와 누군가를 향해 작별 인사를 하는 여인의 흰 손. 그 풍경에 창틀 하나 걸어 놓으니 박수근의 그림을 먼빛으로 보는 듯하다.

툭, 비꽃 하나 떨어져 눈시울에 걸린다.

<박영덕 약력>
▲1992년 ‘월간문학’ 등단
▲한국문인협회 이사, 국제펜 광주위원회 부회장
▲광주문인협회 수석부회장
▲저서 : ‘달개비꽃에는 상아가 있다’, ‘말씀의 우물’ 외
▲수상 : 박용철문학상, 조연현문학상, 광주예총문화예술대상, 현대그룹문학상, 광주문학상, 대한문학상

▶ 디지털 뉴스 콘텐츠 이용규칙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