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21일(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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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마당]쌀밥이 맛있던 그 때 그 시절 - 수필 장영수

  • 입력날짜 : 2020. 08.03. 19:30
희미하게 아침이 밝아 오면 아버지는 나무지게에 ‘옹고발’(‘발채’의 방언)을 끼워 논과 밭으로 일 나가셨다. 옹고발 옆에는 조선낫이 끼워져 있고 괭이와 삽은 발채에 기다랗게 누워 아버지 발걸음에 리듬을 타며 따라다녔다. 하루 일과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들에서 돌아오실 때면 옹고발에는 소꼴이 넘실거리고 머리에 쓴 밀대 모자는 아침 이슬에 젖어있었다. 회색 작업복에는 풀냄새가 묻어있고, 흰 고무신에는 이슬 거품이 세월에 절어 절벅거렸다. 손바닥과 발바닥은 트고 갈라져 언제나 비늘갑옷을 입고 있었다. 저녁이면 갈라진 손바닥과 발바닥 사이사이를 양초 물로 데우셨다.

아버지는 동네에서도 소문난 상일꾼이셨다. 타작한 보릿대 밑 둥이 전날까지 서 있어도 자고나며 논에 물이 찰랑찰랑 차고 넘쳐 모가 심어져 있었다. 지나는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성실하고 부지런 하셨던 내 아버지. 빈손으로 시작하여 억척스레 일을 하셨는데 그 노력의 대가로 매년 논을 사들였다. 앞뜰과 뒤뜰 다랑이 논까지 합쳐 33마지기, 동네에서도 부자소리를 들었다. 요즘이야 다랑이 논을 평지로 개간하여 농기계로 쉽게 일을 할 수 있다지만, 그 시절에는 아버지의 손과 발이 농기계였다. 아버지 등짝에는 언제나 나무지게가 붙어 있었고 낫과 괭이, 삽은 아버지의 장난감처럼 손에서 떨어지는 날이 없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은 집에서 가마니를 짰다. 남들이 쉬는 겨울에도 아버지는 소를 몰고 들로 나가셨다.

집에 누워 계신 날은 몸살을 앓는 날이다. ‘뼈가 빠지게 일한다. 등골 빠지게 일한다’는 말, 아버지의 삶이었다. 덕분에 나는 학교 등록금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도록 납부했다. 넉넉하게 쓰지는 못했어도 경제적인 어려움은 몰랐다. 하지만 일손이 부족했던 우리 집은 학교 공부보다 집안일이 우선이었다. 앞뜰 1모작 벼를 심을 때는 놉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지만, 문제는 뒤뜰 다랑이 논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윗뜸 사람들은 다랑이 논이 많았다. 도랑물이 부족하다보니 비가 오면 너도 나도 빗물에 의지하며 모를 심었기에 놉 구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학교 가지 않은 주말에는 부모님이 일하고 계신 다랑이 논에 점심밥을 이고 ‘외숨골’, ‘뒤재넘’, ‘굴밑’, ‘새품 ’논 골짜기마다 날랐다. 또래 친구들은 시험 공부한다고 집에 있었건만 나는 예외였다. 또 보리타작, 나락타작을 하다 저물어지면 부모님 걱정에 손전등 후레쉬를 들고 마중 나갔다. 부모님은 365일 쉬는 날이 없었다. 겨울에는 가을철에 거둬들인 팥이나 콩 타작을 했고, 두지에 모아놓은 벼를 풍구에 돌려 쭉정이, 겨, 먼지를 걸려내고 좋은 나락만 골라 매상 가마니에 담았다. 들에 있는 곡식은 모두 집으로 거둬들여 마당에서 콩, 팥 타작을 했다. 이런 생활이다 보니 마루청에는 먼지가 소복이 쌓여있었다. 이것이 그 옛날 우리 집 풍경이다. 여름 보리타작, 가을 나락타작을 하고나면 광을 가득 채우고도 마루청아래 죽담에 쌓아놓은 곡식가마니는 내 키보다 높이 쌓여있었다. 사람들이 부러운 눈으로 쳐다볼 때 나는 내색은 안했어도 좋은 줄을 몰랐다. 부모님이 장사하는 친구가 한 없이 부러웠다.

어머니 발걸음은 언제나 동동 거렸다.

앞뜰 논에 모 심는 날은 잔칫날처럼 음식 장만에 분주했다. 놉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려워서 들일을 할 수 없어 집을 지키고 있는 할머니, 시집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동네 새댁을 불러 들였다. 새참으로 가져갈 팥죽을 동네 할머니들과 함께 준비를 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가마솥 장작불지피며 팥을 삶았고. 팥죽에 들어갈 밀가루 반죽은 할머니들이 큰방과 마루에 앉아 밀었다. 펄펄 끓인 팥죽은 양철동이에 담아 새댁이 이고 갔다. 광주리에는 박 바가지와 양푼이 숟가락 팥죽에 먹을 반찬을 담아 어머니가 이고 가셨다. 막걸리 한 말도 곁들였다. 일꾼 숫자보다 젖 먹이러 오는 아이들의 숫자가 더 많아서 팥죽도 넉넉하게 양철동이에 이고가면 이웃 논에서 혼자 일하고 있는 사람들까지 불러들여 나눠먹는 시골 인심이었다. 점심 짓는 가마솥에 장작불을 지피면 널따란 누룽지가 소쿠리로 가득 나왔다. 온 종일 지핀 불로 구들장이 달구어져 큰방은 발 딛기도 겁이 났다. 점심밥은 두 세 명씩 이고 들로 나갔다. 양푼이나 바가지에 밥을 퍼주면 논둑에 퍼질러 앉아 먹었다. 따라온 아이들은 코를 훌쩍이고 얼굴에는 ‘고장물’의 방언

꼬장물이 흘려내려도 쌀밥이라는 별미에 볼이 터질듯이 퍼먹었다. 보리밥만 먹다 쌀밥을 실컷 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자신의 허기진 배를 채우기보다 따라온 자식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쳐다보며 미소 짓는 어머니들은 아기 젖부터 물렸다. ‘배고픈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과 내 논에 물들어가는 것이 제일보기 좋다.’더니 그 시절 어머니들의 마음이었다. 이렇게 먹고 남은 밥은 모를 다 심고 집에 들어가기 전 논둑에 펼쳐 놓으면 저녁밥까지 해결했다. 따끈따끈한 보리밥보다 찬 쌀밥이 더 맛있었던 그 때 그 시절이 가끔은 그립기도 하다.


장영수 약력
▲ 월간 문학세계 수필등단(2008)
▲ 충성대 문학상, 알뜰 생활체험 수기 광주시장상 수상
▲ 빛 사랑 한전 문학상, 표어공모 국방부장관상 수상
▲ 한국문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저서 ‘고동골에 남겨둔 이야기’, ‘행복연습’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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