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화흠 作 ‘백안90’

은백색의 물결, 그 위로 그림자들이 일렁인다. 빗살무늬 형태로 드러난 물감의 마티에르는 화면을 한가득 채운다. 배가 드나드는 포구와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 출렁거리는 바다의 움직임이 떠오르는 그림 한 편이 펼쳐진다.

지난달 21일 구례 출신 고화흠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전남도립미술관을 찾았다.

이번 전시는 지난해 윤재우 특별전 ‘색채의 미’에 이어 올해 선보이는 작고 작가 회고전으로, 연대기 순이 아닌 작가의 다양한 면모를 주제로 꾸며졌다.

작가의 주된 작업세계이자 본인의 이상향을 나타내는 ‘백안’(白岸)에 주목,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그의 작품세계를 만날 수 있는 자리였다. ‘백안’은 작가가 미술대학 교수로서 정년을 마치고 쓴 백안기(白岸記)라는 원고에서 비롯됐다.

“자못 성대한 퇴임식장에서 나는 한편으로는 섭섭하면서도 또 한끗 마음이 설레었다. 그 설레임은 아마도 이제서야 비로소 나의 백안을 찾아, 그 진실을 찾아 홀가분하게 여행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었으리라…(백안은) 못내 한번은 가보고 싶고 가봐야 할 그리움의 언덕일 수도 있고 때로는 허전한 마음속에나 묻어놓고 다가올 진실을 기다리는 빈자리일 수도 있다. 기차 타면 어느 만큼에나 있을 아늑한 곳일 수도 있고 꿈에서나 언뜻 보이고 지나가는 신기루일 수도 있다. (백안기 中)”

그의 ‘백안’ 시리즈에서는 포구와 물결, 모래사장 등이 은백색 추상형태로 나타나 있다. 자연의 서정적인 색채를 캔버스에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엄마와 딸의 모습을 담은 작품도 눈길을 끈다. 얼굴이 명확히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모자를 쓴 긴 머리의 여인이 아이를 안고 있는 듯한 모습을 담은 이 그림은 인물상을 주제로 한 작가의 몇 안 되는 유화 작품이다. 물감이 떨어져 나가는 등 손상이 심했지만, 유족 기증 후 보존수복 처리를 거쳐 관객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관람객들이 고화흠 작가의 수채화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추상으로 접어들기 직전의 반추상 작품들도 여럿 전시됐다.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형상에 노랑, 빨강, 초록, 검정과 같은 오방색 사용이 두드러지는 화려한 색감의 유채화는 한국적인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또 전시장 한켠에는 부인 김인숙 여사의 자수 작품 또한 전시돼 있다.

1949년 이화여대 자수과 1회 졸업생인 김 여사는 전통적인 자수기법 작업 뿐만 아니라 화면에 다양한 재료를 붙이는 콜라주, 배경의 스티치 등을 통한 과감한 현대회화의 요소를 녹여낸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 중 작품 ‘여심1’은 남편인 고 작가가 그린 밑그림을 도안으로 그 위에 자수를 놓은 것으로, 여기에 옛날 동전과 실 등이 콜라주돼 현대적 감각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고 작가는 수채화를 통한 미술문화의 저변확대를 꿈꾸기도 했는데, 전시에서는 수채화의 장르적 특성에 깊이를 더한 ‘빨간 배경’, ‘탁상’ 등 수채화 작품들도 함께 소개한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이연우 학예연구사는 “예술자이자 교육자, 그리고 부인의 예술적 조력자이자 동지로 살았던 인간 고화흠의 다양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며 “단순히 미술전문인과 화가로서 자신의 기량을 보이는 데서 나아가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미술을 향유할 수 있기를 마음 깊이 바랐던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껴보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26일까지 이어진다.

/최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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