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카와 슈헤이(左), 김정훈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죄하고 배상하는 이외에는 길이 없다. 가해자가 배상하지 않으면 누가 피해자에게 배상할 것인가? 이것은 회피주의와 인도주의의 싸움이다. 이 싸움에 참가하는 것이야말로 나 자신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보루(양심)인 것이다.’ -책 ‘인간의 보루’ 중

최근 이용수 할머니가 기자회견 석상에서 위안부와 (근로)정신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언급해서, 국내에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는 익히 알려져 있으나, 아직도 ‘위안부’와 근로정신대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마침 최근 근로정신대의 문제와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일본의 양심적 시민단체의 활약상을 소개한 책 ‘인간의 보루’가 국내에 소개돼 화제다.

본보는 최근 한일 간의 이슈가 되고 있는 근로정신대 문제를 일본의 양심적 활동가가 체험에 근거해 치밀히 기록한 에세이 ‘인간의 보루’에 대한 ‘저자와 역자의 대담’을 3회에 걸쳐 기획했다. 이메일 대담을 통해 진행한 한일간의 이슈를 저자와 역자의 얘기로 풀어본다.
/편집자 주


▲김정훈:언제부터 한국에 관심이 있었나요? 그리고 한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야마카와:저는 1936년 이와테(岩手)현의 산촌에서 태어났어요. 어릴 적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들은 얘기가 마음에 새겨져 있어요. 관동대지진(1923년) 때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고 한다”는 얘기를 나는 의심하지 않고 믿고 있었죠. 조선인에게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런 소문이 전국에 퍼졌으며 당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켜 공격해온다고 하는 얘기까지 들었어요. 약 6천명의 조선인을 일본 경찰과 자경단이 살해했습니다. 그중에는 조선인으로 착각해서 죽임을 당한 일본인도 있었죠. 사건이 벌어졌을 때 경찰이 동향출신의 이토 이사오(伊藤勇雄)를 난리통에 도쿄에서 조선인으로 착각해 체포했죠. 이사오는 고문을 받고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남았습니다. 이토 이사오는 시인으로 일본에서 최초의 프롤레타리아시집 ‘이름을 밝힌 자’(名乘り出る者)의 저자네요. 위인이 되어서 고향에 현창비도 있죠. 내가 조선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최초의 일입니다.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과 이토 이사오에 관한 사연이죠. 자세한 내용은 저의 책 ‘한국낭만방황’ 첫 장에 있습니다.


▲김정훈:또 하나의 모멘트가 있다면서요?

-야마카와:중학교 2학년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태평양전쟁 후 이 세상에 두 번 다시 전쟁은 없을 거라고 믿던 내게 충격적인 뉴스였죠. 그 뒤 신문, 라디오를 통해 매일 이승만, 김일성, 맥아더라는 이름을 들었어요. 내가 조선에 관심을 갖게 된 두 사건입니다.

그로부터 40년 후 경제적으로 약간 여유가 생긴 나는 한국여행을 계속하게 되었죠. 평균 2개월에 한 번씩 홀로여행을 했습니다. 한국어는 ＮＨＫ 라디오방송으로 매일 15분씩 회사 출근 전에 수강했죠. 홀로여행이 가능했던 건 더듬거리는 한국어 덕분이죠.

한국여행과 함께 한국, 조선에 관한 책을 가능한 한 구입해 모았습니다. 모든 책을 숙독한 건 아니지만 지금 책장에는 한국, 조선 관련 서적밖에 없어요. 그 외의 책은 기증했거나 버렸습니다. ‘한국낭만방황’은 약 80회 이상의 한국여행에 관한 결과물이죠.

한마디로 내게 한국은 거대한 ‘역사박물관’입니다. ‘민족이란 뭘까, 역사를 만드는 건 뭘까’. 낭만적 방황의 근저에 존재하는 것을 이 두 사건으로 표현할 수 있죠.


▲김정훈:한국, 조선에 관심 갖으신 두 가지 동기 잘 알겠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학살 사건, 즉 관동대지진 때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목격하고 한일관계를 깊게 성찰하셨단 말이죠.

특히 일본 최초의 프롤레타리아시집 ‘이름을 밝힌 자’의 저자이자 동향출신의 이토 이사오를 일본경찰이 조선인으로 오인하여 그를 궁지에 몰아넣은 사건이 잊을 수 없는 비극으로 인상에 깊게 남아 있으시네요. 임팩트가 느껴지는 얘기로 들립니다. 그리고 한국전쟁, 야마카와 작가님은 일본제국주의가 초래한 한국의 비극적인 사건에서 배우시고 이웃나라의 역사, 문화에 눈을 뜨신 뒤 한일평화의 중요함을 다시 인식하게 되셨다는 말씀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작가님 같은 생각 갖으신 일본인은 일본 내에 소수 아닐까요? 일본의 정치와 언론, 그리고 역사수정주의의 세력에 의해 편향된 눈으로 한국을 보는 현상이 이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니까요. 일본에선 전혀 일본 제국주의시대의 가해적인 역사교육이 이뤄지지 않는 것 같고요(한국에선 역사교육에 치중한다는 얘기를 일본인에게 듣기도 합니다만). 예컨대 한수산 소설가의 ‘군함도’가 일본에서도 번역됐는데 일제강점기에 군함도로 끌려가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해 혹독한 노동을 강요당한 조선인의 비극이나 원폭의 참혹함이 치밀한 조사로 잘 그려져 있어요. 두 번 다시 전쟁과 한일의 비극은 반복돼서는 안 된다고 하는 역사적 교훈을 일깨우는 텍스트죠.

일본에선 이 군함도가 세계문화유적으로 유네스코에 등록된 뒤로 관광지로만 알려질 뿐 어떠한 역사와 배경을 지니는 섬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국민에게 전해지지 않고 있어요. 그 내용을 기록하도록 권고를 받았는데도 반영되지 않고 있는 상태죠.

좋은 시기의 일은 물론 전쟁시대의 비극적인 역사도 숨기지 않고 그대로 공유함으로써 한일 간에는 진실한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고 봅니다만.

-야마카와:일본의 역사교육에서는 거의 조선 식민지지배의 실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습니다. 제가 기억하기에도 아무것도 없죠. 현재 일본의 역사교육에서는 한국병합을 당연한 것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안전과 만주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한국병합이 필요했다. 1910년 무력을 배경으로 한국내의 반대를 억누르고 병합을 단행했다”(지유샤=自由社 간행, 중학사회 새로운 역사교과서). 기술은 이것뿐이에요. 가해국과 피해국의 역사교육의 차가 너무나도 심한 거죠. 군함도에 대해서도 일부 매스컴이 강제노동 관련사항을 보도하고 있지만 서로 역사를 공유해야 마땅하고 김정훈 역자께서 말씀하신 그대롭니다.

다만 현재 역사에 대해서는 무지하지만 한국드라마에 빠져 있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한류드라마는 정말 재미있게 제작한다고 생각해요. 일본의 BS방송의 어딘가의 채널에선 종일 방송하고 있어요. 이건 결코 나쁜 현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대는 한결같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

나는 나대로 극복해갈 수밖에 없어요. 제가 쓴 ‘한국낭만방황’의 1장에 ‘안중근과 치바 도시치(千葉十七)와 다이린지’(大林寺)가 나옵니다만, 나의 본명도 치바이며, 고향에서 다이린지까지는 20㎞ 정도의 거리입니다. 이러한 일본인이 있었다는 사실, 또한 다이린지의 주지 사이토 다이켄(齊藤泰彦) 씨와 같은 일본인도 있어요. 나는 결코 실망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한.


▲김정훈:서로 메일로 대담을 주고받으면서 근로정신대 문제를 테마로 쓴 문병란 시인의 ‘가장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을 번역해 보내드렸는데 어떻게 읽으셨나요?

-야마카와:문병란 시인의 시를 읽고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400년 전의 내용이 좋더군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꿈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선 알고 있는 사항인데 그 잔학한 행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다만 신경 쓰이는 부분, 즉 다음 행에 ‘우치카와 변호사, 다카하시 선생’이라고 고유명사가 등장해서 좀 그렇다고 생각했죠.


▲김정훈:근로정신대 문제를 주제로 쓴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작품이 없어서 허전했는데, 문병란 시인의 작품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느낌이었어요. 이 시를 작년 3월 근로정신대 시민모임의 창립 10주년 정기총회 때 처음 보았는데, ‘근로정신대 손해배상청구소송 소장 한국어판 간행에 부치는 기념시‘라는 부제가 붙어 있더군요.

문병란 시인은 2000년도에 광주의 대표적 시인이자 지역 원로로서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의 이금주 회장과 교류하면서(당시 시인께서는 광주유족회의 자문위원이었기에) 소장(訴狀)의 출판기념회에 맞춰 이 시를 써서 보낸 것으로 확인됐어요. 우치카와 변호사와 다카하시 선생은 그 출판회에 참석차 광주를 방문했다고 해요. 이름을 시에 새긴 건 그렇습니다만 양심적인 일본인이므로 문병란 시인이 일부러 거명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국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죠. 내친김에 책에도 피해자 소송을 이끈 주요인물로 나오니 다카하시 선생, 우치카와 변호사를 직접 소개해주시죠.

-야마카와:또 언급하겠지만 다카하시 선생은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의 다카하시 마코토(高橋信) 대표입니다. 대학졸업 후인 1960년대 중반 나고야에서 재일조선인 학자 박경식(朴慶植)의 조선인강제연행에 관한 강연을 듣고 충격 받아 평생 피해자 지원활동에 헌신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고야 지역 교사로서 근로정신대 문제에 가장 먼저 뛰어든 일본인입니다.

우치카와 요시카즈(內河惠一) 변호사는 1999년 시작해 2008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패소하기까지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일본소송의 공동 변호단장을 역임, 우리 근로정신대 할머니들 변호에 앞장서신 분이죠. 또한 자위대 이라크 파병금지 사건, 조선학교 무상화 사건 등을 맡으며 변호사계의 중진으로서 인권변호에 헌신해온 진보적 법조인입니다.


◎야마카와 슈헤이
와세다대학 심리학과 졸업 후 한때 출판사에 근무했으나 독립해 전문지 ‘저자와 편집자’를 발간했다. 출판업 좌절 후에는 주택산업계로 전신해 하우스 메이커에 근무하면서 창작활동을 펼쳤다.
‘와세다문학’ ‘북(北)의 문학’ 등, 동인지에 소설을 발표했다. 정년퇴직 후에는 문필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에 ‘야마카와 슈헤이 작품집─죽음의 주변’(小說社), ‘백자의 화가’(산이치쇼보), ‘소설 북상천(北上川)’ (산이치쇼보), ‘무뢰파낭만방황’ (산이치쇼보), ‘한국낭만방황’(산이치쇼보)이 있다.


◎김정훈
일본 간세이가쿠인대 문학박사, 주오대 정책문화종합연구소 객원연구원 역임, 전남과학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30여년 한일교류를 해오며 일본문학을 연구했고 일본에서 평론활동을 하며 국내에서는 주로 번역에 매진해왔다. 특히 일본작가의 진보적 활동과 시점을 국내에 소개해온 연구자다.

/정리=정겨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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