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시돈스 모브레이 作 ‘운명’ <위키피디아 검색>

살다 보면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또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헤어짐의 순간도 함께 맞이하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일상 속에서 무수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해가며 살아가고 있고, 그 만남의 시작과 끝 사이를 인연(因緣)이라고 부른다. 흔히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하기도 하는데 만남이 있으면 언젠가는 또 헤어지게 돼있다는 뜻이다.

낯선 이와의 만남이 아주 강렬하기도 때론 밋밋하기도 하듯 그 종류 또한 참 다양하다.

가족처럼 평생을 두고 곁에서 부대끼는 이가 있는가 하면 단 하루 마주침으로 끝나 버리는 인연도 있다. 학창시절 친구들만 해도 그렇다. 대부분이 학년이 바뀌며 헤어져 그 시절에 멈춰버리지만 몇몇 친구들과는 평생을 함께하는 평생지기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외에도 사랑하는 이와의 만남이 그렇고, 친구와의 만남이, 동료와의 만남들이 있다. 그리고 또 어떤 인연은 천륜으로, 내 손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도 있다.

이렇게 천차만별 다양한 종류의 인연이 있지만, 그 만남이 소중했음은 역시나 헤어져 보고서야 알게 되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실상 ‘은연중에 발생하는 다양한 마주침 속에서 대부분은 그것이 인연이었다’라는 사실조차도 알아채기가 어렵게 지나가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그 만남을 통해 마주친 사람들과 여러 가지 사건들이 발생하게 되고 그로 인해 삶 속에 큰 변화가 찾아들기도 한다. 물론 좋은 쪽으로 변화는 삶의 활력소를 가져다줄 좋은 인연이 될 터이지만, 반대의 경우는 흔히 말하는 일종의 악연(惡緣)이라 하겠다.

명작을 남긴 화가들에게도 삶을 바꿀만한 여러 만남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일들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명작의 탄생에 배경이 되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만해도 그렇다. 서자로 태어나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던 아들을 불쌍하게 생각한 아버지에 의해 베로키오 공방에 들어가게 된 다빈치는 그 일을 계기로 예술가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잠시 이탈리아에 들른 프랑소아 1세와의 기적적인 만남은 화가로서의 그의 삶을 빛나게 해줄 귀한 인연의 시작이 된다. 출중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서자라는 이름아래 화가로서 인정받지 못했던 그의 실력은 국경을 초월한 인연 덕택으로 화려하게 빛을 낼 수 있었다.

이 만남을 시작으로 왕실 화가로 화려하게 살다가 죽을 때도 프랑소아 1세의 품에서 숨을 거뒀다는 그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왕과의 인연은 예술가로서 그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줬다.

모든 만남이 좋을 수는 없겠지만 이처럼 얽히고 설킨 인연의 끈들이 모이고 모여 삶의 조각을 만들고 이 조각들이 엮여 마치 한 폭의 그림을 완성시켜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일 것이다.

신화 속에도 인간 삶의 처음과 끝을 실에 꿰어 관장하는 운명의 세 여신이 있다.

‘아무리 영웅이라도 모이라이를 거스를 수 없다’는 말처럼 모든 이가 태어나 죽을 때까지를 운명의 실타래에 굴리는 여신들을 모이라이(각자가 받은 몫)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자매들의 이름은 클로토(실을 잣는 것), 라케시스(운명의 그림을 그리는 것), 아트로포스(불가피 한 것)이다.

여신들이 등장하는 작품으로는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한창 유행하던 사실주의나 인상파의 흐름과는 조금 거리를 갖는 ‘미국식 르네상스’ 그룹의 중심에 있었던 ‘헨리 시돈스 모브레이’의 작품 ‘운명’을 소개해 볼 수 있겠다.

고전 그림 속 운명의 여신들은 대다수가 늙고 때론 추하게 묘사되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의 삶을 마감한다는 것 자체가 죽음과 연관되기에 어떨 땐 손에 가위를 든 여신의 얼굴은 해골처럼 묘사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화가 ‘알렉산더 로타우그’의 작품 ‘운명의 세 여신’에서 보면 왼쪽에서 실을 뽑고 있는 여신 클로토와 맞은편 실을 감아 짜고있는 라케시스 사이 화면 가운데 앉은 아트로포스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보이는 그대로 검은 옷을 입은 채 왼손에 가위를 들고 작심한 듯 무거운 표정으로 실을 자르려는 찰나 그녀의 모습은 조금 섬뜩하기도 하다.

알렉산더 로타우그 作 ‘운명의 세 여신’

반면에 ‘모브레이’의 작품 ‘운명’ 속 여신의 모습은 하나같이 젊고 아름다운 테피스트리로 묘사돼있다. 게다가 화면 왼쪽에서 왼손으로 수정구슬을 살피며 오른손에 가위를 든 채 작품을 마감하고 있는 아트로포스의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밝고 화려하게 치장한 채 구슬속에서 무언가를 한참 들여다 보고 있는 그녀의 이미지는 로타우그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

화면 오른쪽 다른 여신들은 수정 거울을 통해 전달되는 이의 생애를 귀담아들으며 한 땀 한 땀 수를 놓고 있다. 이들의 묘사도 세밀할 뿐만 아니라 그녀가 쓰는 채색 기법 또한 보는 이의 마음을 미묘하게 움직여 내고 있다.

너무나 유명한 다빈치의 작품 ‘모나리자’에서 여인의 실루엣과 배경 사이 묘한 느낌을 눈여겨 본적이 있을까?

레오나르도 다빈치 作 ‘모나리자’<위키피디아 검색>

르네상스 시기 다빈치가 연구해낸 이 ‘스푸마토 기법’은 마치 연기처럼 인물과 배경 사이 사이를 적당히 녹여내고 있는데, 이는 그림에 깊이 있는 농담을 부여해 보는 이로 하여금 풍부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 기법을 모브레이가 자신의 작품에 녹여낸 것인데, 미국판 르네상스 혹은 낭만주의라고 불리는 화풍으로 르네상스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라기보다는 유럽이 아닌 미국만의 개성을 살려낸 화풍이라 생각하면 좋겠다.

어릴 적 부모를 여의고 삼촌의 보살핌 아래에서도 미국화단에 우뚝 설만큼 잘 성장했던 모브레이가 그림 시작 후 다녀온 5년간의 파리 유학이 그녀의 화풍에 영향을 많이 준 듯하다. 이처럼 기법이 가져오는 몽환적인 느낌은 보는 이의 감성을 자극해내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얽히고 설킨 인연의 끈들이 모이고 모여 삶의 조각을 만들고 이 조각들이 엮여 한 폭의 그림을 완성시켜가는 것이 아마도 우리네 인생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삶 속 무수한 만남과 헤어짐의 사이를 교차하는 인연들이 바로 이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 관계에 있어서는 실을 짜는 동안 복잡하게 얽혀 힘들게 풀어야 할 과정이 생기듯이 모두가 내 맘 같을 수는 없고 인연에도 늘 해피 엔딩만 있지는 않다.

<이현남·전남대 미술이론 박사수료>

오히려 소중한 사람일수록,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말로 전달하지 않아도 어련히 내 마음까지 알아주겠지’하는 ‘무모한 믿음’이 작용할 경우가 많아 작은 일에도 투정 부리게 하고 심술부리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필자도 근래 마음이 복잡해 나와 얽힌 여러 인연들을 차분히 고민해 볼 시간을 가지기도 했었다. 부디 모두가 얽힌 실이 아니라 연분홍 아름다운 실로 남아줬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한참을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어려운 건 매한가지이다.

언제쯤이면 인연이 들고나는 이 부산스러운 순간들을 그저 물 흐르듯 받아들일 수 있게 될까?

그건 아마도 시간이 해결해줄 일인듯 하다.

▶ 디지털 뉴스 콘텐츠 이용규칙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