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식 시인·시앤영 원장

입추는 싱거운 음식을 먹고 난 후의 순한 혀처럼 부끄러움이 아주 많은 시골의 여인 같다. 그리고 언제 다녀갔는지 알 수 없는 집배원의 지친 걸음을 닮은 것 같아서 미련이 남는다. 어렵게 찾아왔다가 더위에 떠밀려서 순간 사라져버린 신세가 어느 날 느닷없이 애인으로부터 절교 선언을 받고 어리둥절해서 몸이 돌이 되어버린 순하디순한 한 사람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 지독한 더위가 며칠 전에 떠나고, 그러니까 처서(處暑)가 지나고 나서 긴 소매의 남방셔츠를 꺼내어 바람결에 말리는 기분이 점차 생활의 기운을 돋게 한다. 집배원이 넣어두고 간 우편함 속의 한 소식을 이제야 꺼내놓고 읽어보는 느낌이다.

8월의 열대야는 불쾌한 일과 비상식적인 상황을 겪을 때의 고충처럼 입맛을 잃게 하고 심지어 고즈넉함마저 빼앗아버릴 만큼 혹독했다.

그러나, 8월을 지나오면서 느낀 건, 한 계절의 고통이란 것이 이처럼 사람을 버겁게 만들기도 하지만 자기 내면의 불화와 갈등의 잔주름을 새로이 발견케 한다는 점도 새삼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여름은 착한 애인이 불쑥 얄미운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같아서 흉중에 돌 하나가 박혀 있다.

필자의 지인 중에 유독 환절기를 못 견뎌 하는 이가 있다. 특히 팔월 끝자락에서 9월의 끝자락으로 가는 어느 길목쯤에서 그는 마음의 병이 찾아와 헤매기를 흰나비같이 한다. 마음이 풍선 바람 빠지듯 공허해지면 그는 자기만의 지적 갈증을 채우기 위해 떠나고 또 떠난다.

대도시가 아닌 소읍의 한가로운 곳을 찾아 방황하는 것인데, 그곳에는 반드시 미술관이 있거나 개인이 운영하는 갤러리가 있다. 그렇게 한 계절을 보내고 나서 전시 도록을 살펴볼 때는 그의 눈빛이 고요하고 몸의 움직임이 고즈넉해져서 마치 가을의 우물 속에 내려앉은 낙엽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9월 첫 주에는 백로(白露)가 들어앉아 있다.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을 모아서 얼굴에 문지르면 고된 여름의 열기가 가라앉으며 순해질 것이다. 그리고 쌀뜨물같이 하얀 얼굴을 하고 걸어가는 한 사람과 우연히 마주쳐서 그날 밤을 뒤척이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시나브로 가을이 찾아와서 이제는 무엇을 탓하거나 억지 부리는 경우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가을은 예민한 사람을 홀로 있게 만들고 삿됨을 멀리하게 한다. 사나운 여름에 빼앗긴 사색이 조금씩 돌아오는 기척을 나뭇잎 뒹굴 때 느끼게 된다.

대상이 없는 편지는 없겠지만 상대로부터 답장을 받지 못하는 경우는 끔찍할 정도로 슬픈 일이다. 하지만 쓰고 또 지우기를 반복하는 사이에 옛날은 그리워지게 되고 밤이 오면 까마득한 기억의 편린들이 먼지처럼 쌓여서 괴로움을 몰고 오기도 한다.

몇 해 전, 제주도에서 선물로 보내온 이중섭(1916-1956)의 편지글 모음집인 『이중섭 편지』를 읽는다. 그 사람도 필자처럼 가을 바다를 만나러 제주도에 머물다가 이중섭 미술관에 들러 구매한 것이라는데 그림엽서와 함께 부쳐왔다. 부산 시절과 통영 시절과 서울 시절에 이어 대구, 그리고 1956년 9월 6일 생을 마감할 때까지의 마지막 시절로 꾸며진 편지에서 「마지막 편지」를 옮겨본다.

나의 소중한 남덕 씨. 성베드루정신병원에서 앞으로 1주일이면 퇴원한다오. 마음 놓아요. 너무 그대를 만나고 싶어 무리한 탓이라는 생각이 드오. 건강한 모습으로 기다려줘요. 힘차게 살아주세요. 그럼 건강하게, 답장 부탁드리오. 중섭

-이중섭, 양여관 옮김, 『이중섭 편지』, 현실문화, 2015

가을 속에는 살짝 소시오패스 성향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바람이 신체 일부에 닿았을 때 느낄 수 있는데, 같은 시간대의 바람일지라도 손목에 닿는 바람은 생의 쓸쓸함을 돌아보게 하고, 목덜미에 닿는 바람은 너무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오는 설움 같은 눈물을 쏟게 했던 옛일을 떠올리게 하고, 얼굴에 닿는 바람은 모든 미련을 돌부처로 만들어버린다.

9월에는 바다로 가서 가을바람을 받으며 한층 깊어져 가는 자신의 생을 발견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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