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17일(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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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최초 여기자는 독립운동가
남성숙 광주매일신문 사장

  • 입력날짜 : 2019. 02.27. 18:55
오는 3월1일은 3·1독립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적으로 독립정신과 항일운동가를 재조명하는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광주매일신문도 19일 광주시의회에서 ‘3·1운동 100년과 광주미래 100년’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고, 26일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광주전남지회도 ‘광주·전남 항일독립운동 속 여성들’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전체 독립유공자 1만3744명 중 여성 참여자로 등록된 대상자는 1931명으로 나타났다. 여성 참여자 중 248명만이 독립활동을 인정받고 있어 전체의 1.8%에 그치고 있다. 광주·전남 출신은 1107명 중 41명(3.7%)이 여성이다. 자료 부족이나 기준미달, 행적미상 등으로 다수가 선정 대상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사 정리가 남성 중심으로 이뤄지면서 여성 주체들이 잊히거나 배제된 것 때문에 여성독립운동가들이 묻힌 것은 억울할 일이다. 여성은 의병뿐만 아니라 3·1운동을 기점으로 지역, 계층, 성별간 소통에 기초한 항일 구국투쟁의 주역이었다.

광주·전남 여성독립운동은 수피아여고와 정명여학교의 만세운동, 비밀결사 소녀회, 광주여고보의 백지동맹, 수피아 여학생들의 백청단, 항일전사 양방매 등이 있다.

미국에 사는 도산(島山)안창호(安昌浩) 선생의 장녀 수산(繡山)의 자택에서 가로 49㎝, 세로 31㎝ 크기로 발견된 ‘대한여자독립선언서(大韓獨立女子宣言書)’를 보면, 당시 여성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는지 알 수 있다.

‘식이 몽매(蒙昧)하고 신세가 연약한 아녀자의 무리이나 국민 됨은 일반이오 양심은 한가지라…동포여 때는 두번 이르지 아니하고 일은 지나면 못하니 속히 분발할지어다 동포시여 대한독립만만세.’

선언서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동포의 억울함과 일제의 만행에 고통받는 설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연약한 여자 몸으로 독립운동의 뜻은 있으나 행동으로는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독립운동에 있어서는 여성과 남성은 서로 대등하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다. 역사 학자들은 대한여자독립선언서가 지닌 역사적 의의는 3·1 독립선언서에 버금가는 힘과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필자는 저서 ‘호남 천년의 얼굴’(호남인물150명)에서 광주최초 지방여기자 최현숙(崔賢淑)을 다뤘다. 필자는 지역 최초 여기자라는 데 초점을 맞추고 그녀의 일생을 추적했다. 그러나 알고보니 김양균 전헌법재판관의 어머니이신 최현숙여사는 광주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주역이자 독립운동가였다.

수피아 여학교를 10살에 들어간 최현숙은 3학년때 3·1운동을 만났다. 그 당시, 최현숙은 박애순 전신애씨와 함께 주동이 되어 밤새 태극기를 그렸다. 최현숙은 광주에서 일제히 봉기하기로 된 날인 3월10일 머리를 땋고 끈으로 맨 뒤 짚신을 신고 수피아 여학교에서 광주시장까지 가면서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광경에 놀란 왜경과 일본헌병들이 채찍으로 등짝을 치고 발길로 차는 등 온갖 행패를 부리면서 그들을 잡아들였다.

최현숙 역시 끌려가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다. 그때 일본 경찰이 ‘만세를 부르게 한 주동 이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주동자는 나다’고 당당히 말하면서 ‘애국심에 불타는 마음으로 만세를 불렀다’고 주장했다. 박애순 전신애와 함께 감옥생활을 하면서 최현숙은 머리를 많이 맞았다. 4개월 징역을 살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감옥에서 나온 최현숙은 서울 정신여학교에 진학한다. 방학때는 야학을 가르치는 등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의 정열을 주민 계몽사업에 바쳤다. 정식여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에 내려온 최현숙은 21살 때 그당시 동아일보 광주지국장을 하고 있던 김용환과 결혼한다. 최흥종 목사의 주례로 결혼한 후 동아일보 광주지국의 총무 겸 여기자로 활동하면서 광주 최초 여기자로 활동하게 된다. 교육자였기 때문에 문장력이 좋고 문필력도 뛰어나 당시 최현숙 선생의 기사는 널리 읽혔다. 해방후 홀로된 시어머니를 90세까지 봉양하면서 3명의 시동생과 두 명의 시누이를 교육시켜 결혼시켰다. 특히 시동생 김용준은 광주고보 학생의거의 주역으로 3년이나 옥바라지를 했다. 3·1운동 애국지사였던 최여사는 시동생을 애국지사(건국훈장 애족장 제889호)로 키워냈고 슬하의 자식들도 훌륭하게 키워냈다.

2017년 4월 3·1운동 98주년기념, 3·1여성동지회창립제50주년 기념으로 ‘3·1여성들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제로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주최 심포지엄에서는 최현숙지사의 항일독립운동이 재조명되었다.

이때 학자들은 최현숙지사의 항일운동에서 가장 큰 의미로 ‘4개월간 옥고를 치른 15세 최연소 참가자였다는 점’을 높이 샀다. 그러나 아직 우리 지역에선 유관순은 기억하지만 최현숙지사를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청년시절엔 독립투사로 사셨고, 학교를 졸업하고는 민족청년을 기르는 교육자로 사셨으며, 결혼후엔 광주지역 최초 여기자로 변신해 지역언론 창달에도 기여했던 최현숙지사야 말로 광주근대사에서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어쩌면 남성 위주의 보훈정책과 여성 항일투쟁사에 대한 낮은 관심이 이들의 업적을 외면해 온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3·1운동은 여성사적입장에서 가히 혁명적인 사회운동이었다. 올해 100주년을 가장 잘 기념하는 방법은 소외된 여성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제대로 조명해 똑똑히 기억하는 것이다.

필자는 광주지역 최초의 여기자가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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