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16일(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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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죄하지 않는 전두환, 일본한테 배웠나
나의갑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

  • 입력날짜 : 2019. 08.25. 18:02
그는 오래된 시간을 입고 있었다. 가톨릭 성직자의 외출복인 로만 칼라에서 그 시간이 조용히 일렁이고 있는 거 같았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말할 때 4·19혁명-부마민주항쟁-5·18민주화운동-6·10민주항쟁을 4대 민주화운동이라 꼽는데, ‘마흔 살’ 어쩌고 부마의 나이 얘기가 나오면서 옷의 시간이 딸려 나왔다. 곁에 있던 내게 그가 “그때 입었던 옷이요” 하고 가만히 속삭이기에 알았다. 부산·경남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그의 이름은 높다, 송기인 신부.

부마항쟁기념재단 송기인 이사장은 8월21일 부마를 모시고 광주에 왔다. 부마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준비한 ‘부마 1979-유신의 심장을 쏘다’란 전시를 5·18민주화운동기록관 3층 전시실에 풀어놓았다. 전시는 부마로만 구성된 게 아니다. ‘부마에서 광주로’란 섹션 이름표를 달고 5·18도 외친다. 1979년 10월16일이 부마의 생년월일이고, 5·18의 그것은 1980년 5월18일이므로 둘의 나이 차는 한 살도 안 된다. 그런 둘 사이에 닮은 데가 좀 많다는 데 이 땅의 역사는 관심이 머물러야 한다는 생각이다.

저항의 에너지 분출, 이게 가장 닮아 있다. 다들 숨죽이고 있을 때 둘은 외롭게 피 흘리며 못된 권력에 저항했다. 부마는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에, 광주는 제2의 박정희 역을 음모한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에 항거했다 함이다. 닮은꼴 2는 악랄한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폭동적 강경진압’을 했다는 것인데, 부마도 광주처럼 똑같이 ‘폭동’으로 매도되었다. 저항의 촉발이 대학으로부터 왔다는 건 그 3으로, 부마에서는 부산대가, 광주에선 전남대가 스타트라인에 섰다. 마침내는 시민항쟁으로 불타올라 인근 지역으로까지 번져가면서 나눔과 배려라는 공동체 정신이 등장했으니, 이건 그 4다.

몹시 수상스런 닮은꼴도 있다. 부마 당시 부마를 취재했던 한 신문기자의 기록을 보면 ‘전라도 군인들이 경상도 사람들 씨 말리려 왔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걸 광주의 유언비어에 대보면 그냥 넘겨버리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해 봄, 광주 쪽 대표 유언비어 역시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 씨 말리려 왔다’였다. 그렇다면 심하게 닮아 있지 아니한가. 실행자와 대상(‘전라도’, ‘경상도’)만 바뀌어 있을 뿐,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이 정도라면 유언비어의 생산자 및 유포자에 대한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도 있겠다 싶어진다. 부마와 광주의 협업으로 삼으면 어떨는지….

올 4월23일, 한 방송사가 ‘전두환, 부마항쟁 진두지휘했다…문건 최초 확인’이란 제목의 기사를 단독으로 내보냈다. 40년 만에 발굴된 ‘그 전두환’이 진짜라는 확신이 서는 건 그가 수장인 보안사령부에서 생산해낸 기밀문서(‘부마사태의 교훈’)인 까닭이다. 그 문건에 ‘(10월18일 낮) 12시20분께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이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를 방문해 계엄사령관, 제3공수특전 여단장 최세창 장군(5·18 광주에도 투입되었음), 501보안부대장 권정달 대령이 동석한 자리에서 사태 배경 및 진압 과정, 진압작전 계획 등을 검토했으며’, ‘소요사태 수습은 초기진압이 가장 중요하다’, ‘시위대에 강력한 수단을 사용하라’는 것 등이 기록되어 있음에서, “보안사령관은 보안사만 지휘하지, 그 외의 것은 지휘권이 없잖아”란 전두환 씨의 주장이 빨간 거짓임이 확인된다.

전두환이 부마 때 부산에 갔다는 사실은 광주에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부마의 진압 방식을 광주에 적용한 건 전두환의 기억으로부터 나왔을 거다. 부마가 준 교훈에 따라 만든 ‘폭동적 진압계획’을 광주에 그대로 재현한 때문이다. 묻는다. 부마에 공수부대를 풀자고 대통령 박정희한테 젤 먼저 누가 말을 끄집어냈을까? 나는 ‘전두환’을 답으로 내놓는다. 1960년 공수부대 창설을 위해 미국에서 특수훈련을 받았고, 1공수특전단장을 지내는 등 그 방면에 조예가 깊다는 거 아닌가. 어쨌거나, 이 또한 부마 쪽과 협업감이다. 하나 더 얘기하면, 부산 갔던 전두환이 그보다 더 큰불이 난 광주엔 안 가고 끝까지 배겼을까? 나의 답은 ‘갔다’다. 부마 때는 자기 위로 커다란 대통령이 있었지만, 광주 때는 사실상의 젤 윗사람이 본인이었음을 상기해봐라.

대한민국의 올 여름이 유독 더 더운 건 왜인가. 아베의 경제왜란이 부아의 몸통이라지만, 식민지배의 옳지 못함에 ‘반성’도 없고 ‘사죄’도 없음이 ‘일본 더위’의 기초를 이룬다. 그 더위 못지않은 더위라면 광주로선 단연 ‘전두환 더위’다. 그 또한 스트레이트로 ‘반성 없음’, ‘사과 없음’이다. 5·18 당시 ‘전두환의 광주사태’를 지지했던 일본, 전두환은 일본한테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라도 받았다는 것인가. 지지하고 흘려주고(북한남침설) 밀어주고(88올림픽) 대주고까지(차관) 했다는데, 공부인들 못시키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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