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23(월)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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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장흥군 용산면 용인마을에 살고 있는 여든두 살의 박회림 씨는 어릴 적의 친할머니와 얽힌 추억을 회고한다. 배고픈 시절, 술 빚을 때 고두밥을 몰래 훔쳐 먹었던 추억을 공감하는 이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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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박록담 한국전통주연구소장이 펴낸 ‘다시 쓰는 주방문(酒方文)’에 따르면, “우리의 전통주는 고두밥에 누룩과 물을 섞어 만든 술”이다. 특히 우리나라 술문화는 조선시대 유교의 영향으로 제사와 명절 같은 세시풍속이 중요시되면서 가문마다 비법으로 전해 내려온 가양주(家釀酒)가 꽃을 피운 것이 특징이다.
장흥군 관산읍 용전리에서 태어난 박씨는 밀양분파 진원박씨 11대손으로, 이 가문의 가양주가 바로 ‘서숙술’이다. 일반적으로 술의 주재료는 멥쌀과 찹쌀이지만, ‘서숙’으로 빚는 것은 이 집안 특유의 비법이다.
지난 9월 초, 취재팀이 장흥 관산읍을 둘러보니 벼는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고 조는 온통 초록빛이었다. 어른 팔 길이만큼 자란 조는 강아지풀처럼 생긴 이삭을 드문드문 패고 있었다. 생김새는 언뜻 보기에 ‘풀’이나 ‘피’를 닮아 있다.
22살에 관산읍에서 용산면으로 시집오기 전까지 서숙 농사를 지었다는 박씨는 그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봄에 쟁기 따라가면서 서숙 씨를 쭉쭉 흐쳐요. 이거 가꾸기가 겁나 힘드러라. 밴 놈 솎아주고, 풀 뽑을랑께 몇 번씩 밭을 매. 서숙은 농약 안 하는디 어느 한 해는 메뚜기가 서숙에 덩어리로 엉겨 붙어서 잎사귀를 싹 갉아 묵어부러. 그라믄 여물이 안 드니까 손으로 메뚜기를 몇 날 며칠 잡았제. 10월에 거두면 서숙을 머리에 이고 와서 홀태로 훑어내고 볕에 짱짱하니 말려놔. 손으로 비벼보면 알갱이가 톡 깨져 나와. 그게 잘 말려진 거야. 알갱이 나오게 도리깨로 두들기는디 뒷다리가 땡겨 아파 부러. 알갱이가 나오면 방앗간에 가서 찧어. 껍질이 벗겨지면 서숙 색깔이 노~래. 우리 친정이 ‘동네에서 부자’라고 말 듣고 살았는디, 밭이 한 40마지기 되었어. 서숙은 반 마지기 정도 심었을 거요.”
오곡 중 가장 작은 곡물인 조 한 줌을 얻기 위해 숱한 노동과 수많은 땀방울이 있었음을 누가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요즘은 서숙 농사를 짓는 이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예부터 우리 농경문화에서 조는 구황작물로 친숙한 잡곡이었으며 조를 주식으로 먹을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시절도 있었다.
“서숙으로 밥도 해묵고 죽도 쑤고 술도 빚었고 그랬제. 나 쪼깐해서부터 할머니가 서숙술을 맹근 걸 알아.”
쌀이 귀한 시대에, 조를 이용해 음식문화를 열었던 조상들의 지혜가 그의 말에 가득 담겨 있다.
친할머니로부터 이름 대신 “강아지~”라는 애칭을 들으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그는 서숙술을 만든 할머니를 보며 자랐고, 친정엄마가 시어머니 손맛을 이을 때 술 만드는 일을 도우며 함께 했다. 친정에는 아무도 술을 마시지 않지만, 다달이 제사가 있을 정도로 종갓집이기에 제사나 집안 대소사가 있을 때 시간과 정성을 많이 들여서 준비해야 하는 음식이 바로 서숙술이다.
처음에 찹쌀과 보리쌀, 노란 서숙의 황금 비율을 2:1:1로 해서 물에 서너 시간 불린 후, 깨끗이 씻는다. 이것을 40여 년간 손때 묻은 옹기 시루에 안쳐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시루에 김이 몽글몽글 피어오를 때면, 더욱 그리워지는 이가 있으니 그의 남편이다.
시댁인 용산면 묵촌마을에서 살다가 지금의 동네로 분가한 후, 서숙술을 빚게 된 것이 바로 남편이 애주가였기 때문이다.
남편 이종찬 씨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장성 황룡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던 ‘장태전법’의 주인공 이방언 대접주의 증손자이다.
장흥군 용산면 출신인 이방언 장군은 당시 ‘장태’(닭의 둥지)를 사용하여 ‘장성 황룡강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싸워 대승을 거두며 ‘장태장군’이라 불리었다. 120여 년 전, 조선사회의 불평등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농민들의 저항은 장태장군과 함께 불일 듯 일어나지만, 마지막 격투지 장흥 석대에서 결국 패배로 끝이 난다.
“장태장군으로 아들을 데리고 부자간에 동학운동을 했는디 서울로 올라가다 잡혔다고. 당시 일본군이 장흥 서국민학교에서 부자(父子)를 묶어 짚 뭉치에 둘러싸서 불로 태워서 죽여 부렸대.”
불행하게도 그렇게 처형당한 것으로 모든 상황이 종료된 것은 아니었다. 동학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이들은 동네에서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죄인처럼 살았으며, 심지어 일본군에게 재산을 다 몰수당한 까닭에 가난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남편과 함께 농사, 철물점, 자전거 수리 등 온갖 잡일을 하며 억척스럽게 살았다고 술회하는 박씨는 척박한 땅에서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다시 살아나는 서숙처럼 신산했던 세월을 꿋꿋하게 이겨냈다.
통한의 기나긴 세월이 흐른 후에야 이방언 장군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역사적인 인물로 새롭게 재조명되고 오늘날에는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그의 숭고한 업적을 기리게 된다.
오랜 세월 동안 장흥 동학운동의 가치와 의의를 회복시키는 중심에 바로 이종찬 씨가 있다. 6년 전,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련해 놓은 땔감으로 고두밥을 안치면서 박씨는 아련한 그리움에 젖는다.
30분쯤 지나 고들고들한 고두밥 완성. 제대로 된 술맛을 내기 위해서 고두밥을 식힌 후, 고두밥 2되에 1㎏ 정도의 누룩을 골고루 섞는다.
“옛날에 밀 농사도 지어서 할머니가 누룩 만든 것도 봤어. 밀과 보리를 말려서 맷돌에 들들 갈아가꼬 물을 타서 반죽을 해. 손에 쥐면 딱 쥐어질 정도만 해서 물을 적당히 해야 돼. 천 보자기에 싸서 테두리만 있고 밑은 없는 됫박같은 데 담아가꼬 발로 잘근잘근 볿으면 드러내불제. 따땃한 아랫목에 짚을 깔아가꼬 메주처럼 한 10일 정도 띄워. 이게 뜨느라고 방에 들어가믄 술냄새가 풀풀 나요. 다 되믄 옛날에 옹댕이(새끼줄로 만든 바구니)에 담아서 창고에 놔두제.”
누룩은 그가 살고 있는 ‘용인마을’과 인연이 있다.
1986년 장흥군에서 펴낸 ‘마을유래지(由來誌)’와 1995년 장흥문화원에서 발행한 ‘용산면지(蓉山面誌)’에서 서술하고 있는 연유는 다음과 같다.
1800년대 인천이씨 이치석(李致錫)이 처음으로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됐는데, 남상(南上)면과 남하(南下)면이 합병돼 용산면이 됐고, 용인마을은 인암리(印岩里)에 속했는데, 1986년 인암리 4구로 분구됐다. 이후 한자 용산(蓉山)의 ‘용’(蓉)자와 인암(印岩)의 ‘인’(印)자를 따서 용인(蓉印)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마을은 ‘옛날 인암리 본 터에 밀을 많이 재배하며 누룩을 만들었다 하여 국정(麴亭)’이라 불리게 된다. 오랜 세월 술을 빚어 온 전통을 자랑하는 마을이기에 그 술맛이 어떨지 자못 궁금하다.
고두밥과 누룩을 섞은 ‘술밥’을 적당한 크기의 항아리에 담아 따뜻한 황토방으로 옮기는 박씨.
그는 손으로 항아리 속 술밥을 다독다독 누르면서 “이렇게 술밥을 눌러놓고 물을 가만히 부어야 지가 숙성되면서 보글보글 떠”라고 말한다. 2리터쯤 되는 물을 양푼에 담아 다섯 번 붓는데 저울이 없어도 눈대중이 아주 정확하다. 항아리 둘레를 이불로 둘러싼 후, 대나무 소쿠리로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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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못 쉬니까 소쿠리로 덮어놔야 해. 사람이 숨을 쉬어야 건강한 거 맹키로 이것도 숨을 쉬어야 살제. 뚜껑을 구멍 없는 걸로 덮으면 숨이 죽어 분께 술이 안 되제. 이것하고 사람 목숨하고 똑같애.”
술독 하나에도 아기 다루듯 정성 어린 손길이 담겨진다. 야무지게 술독을 정리해 놓은 그는 애정 어린 말 한마디를 건넨다.
“술아~ 실수 없이 잘 되어라.”
그렇게 3일간 놔둔 후 뚜껑을 살포시 열어보면, 술독 안은 놀랍게도 신비한 조화를 부린다. 시각적으로는 기포가 그득하고 청각적으로는 연신 ‘뽀글뽀글’ 소리를 내고, 후각적으로는 술 익는 냄새가 진동한다. 누룩 속에 곰팡이가 발효돼 술이 돼가는 현상이다. 이제 술이 쉬지 않고 제대로 익도록 하기 위해 술독을 따뜻한 방으로 옮겨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술이 잘 익었다는 것을 아는 방법은 고수만의 예리한 감각이었다.
“나는 아직 실수를 안 해 봤어. 술이 잘 됐다는 것은 ‘냄새’를 맡아보면 알아. 술이 다 익으면 달달해.”
그가 빚은 달달한 술맛에 남편도, 이웃 사람들도 반했고, 그의 손맛은 동네방네 온 사방에 소문이 날 정도였다.
“우리 남편이 군의원을 2번 했는디 우리집에 보통 손님이 많이 온 것이 아니여. 기자들, 학자들, 수십 사람들이 와 가꼬 내가 징글징글 할 정도로 손님을 치렀는디, 그분들에게 술을 직접 만들어 드렸제. ‘아짐, 술 좀 만드시오’라는 말을 많이 들었제.”
해마다 정월 대보름 안에 치르는 용인마을의 큰 행사인 ‘산신제’에서도 ‘박회림표 서숙술’은 빠지지 않는다.
용산면의 명산인 해발 609m 부용산은 1897년 이방언 장군이 장흥농민들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끝까지 지휘하며 항거하다 일본군과 관군에 전멸당한 역사적인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산이다.
선대의 발자취가 서린 부용산을 신성하게 여기고 마을의 안녕과 농사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그의 남편 고(故) 이종찬 씨는 약 50년 전에 ‘산신제’를 만들었고 이곳 마을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2001년, 용인마을에 ‘부용산악회’를 조직해 부용산의 등산길을 잘 가꾸고 친목을 다지는 화합의 장으로 활용해 온 것도 남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남편을 섬기고 사람들을 환대하기 위해 정성을 다한 그의 헌신의 마음이 보다 좋은 서숙술을 빚는 또 하나의 귀하고 특별한 재료가 된 셈이다.
술을 담근 지 5일째가 되자, 드디어 다 익은 술을 맛볼 수 있는 ‘술 거르기’에 들어간다. 거르는 방법에 따라 ‘청주’가 되거나 ‘탁주’가 된다. 청주는 대나무로 엮은 기다란 ‘용수’를 술독에 박아 그 안에 괴는 맑은 술이다. 탁주를 만드는 방법은 손이 많이 간다. 둥글넓적한 큰 통 위에 그가 직접 깎아서 만든 오래된 ‘쳇다리’를 걸치고 그 위에 체를 올린 다음, 술독을 통째로 부어 손으로 마구 비벼대면서 술지게미를 제거하고 걸러낸다. 진한 원액 때문에 적당히 물을 타서 농도를 맞추면 탁주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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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숙술을 한 잔 음미해보면 시중에 파는 쌀막걸리보다 진하면서 부드럽고, 쌉싸름하면서 달큰하다. 장흥 땅과 햇살, 바람이 키워낸 쌀과 보리, 서숙, 밀이 만들어 낸 맛의 조화가 묵직하게 혀를 감싼다.
1대 친할머니, 2대 친정엄마에 이어 3대째 서숙술을 만들며 전통의 명맥을 잇고 있는 박회림 씨. 팔순이 넘어 몸은 늙어가나 서숙술을 빚는 솜씨는 변함없이 살아있다. 장흥에 전해 내려오는 토속주이자 우리 전통주인 서숙술이 그가 살아생전에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기록유산으로 남겨지길 간절히 바란다.
<남도밥상탐험대=최지영·남정자·박기순·조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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