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기 광주교대 명예교수

“여보, 나 출근할게!”

A교수가 아침을 먹고 거실에서 서재로 들어가며 아내에게 한 말이다. 아내도 천연덕스럽게 “그래요.”라고 답을 한다. 실제로 출근이다. 서재에 들어가 컴퓨터를 켜고 밀린 원고 작업을 시작했다. 서재 밖으로는 벚꽃이 만발한 잘 만들어진 산책로, 시냇물, 냇가의 푸르른 봄풀들이 보인다. 멀리에는 봄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멀리 보이던 주택 단지가 아파트 단지로 바뀌고 있다. 혹시 산이 완전히 사라질까 걱정이 됐다. 다행히 산 중턱 이상의 윤곽은 남아 있을 것 같아 안심이다. A교수의 대학 연구실에서는 무등산이 바로 보였는데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시야가 완전히 막혀 안타까움이 컸었다.

A교수는 초등학교때 부터 결혼 전까지 20여 년간 자취를 했다. 대부분이 그러했지만 그도 늘 앞뒤가 다 막힌 조그마한 월세방, 또는 반지하에서 거주했다. 대학시절에는 기숙사 생활해보는 것이 꿈이었으나 그런 호사는 누리지 못했다. 신혼생활도 반지하에서 시작했다. 그는 산촌같은 농촌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낸 탓에 탁 트인 시야와 자연을 늘 그리워 했다. 훗날 아파트를 구할 때 앞뒤로 아파트만 보이는 그러한 곳은 가능하면 피했다. 재건축 후 동호수를 추첨할 때, 높은 층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운이 따라 앞뒤로 전망이 탁트인 중간층의 아파트에 입주하게 됐다.

재직 시절과 달리 이제는 집의 좁은 서재에서도 어느 정도 집중을 잘 한다. 얼마 있다가 A교수의 아내가 문을 열더니 커피 마시겠냐고 묻는다. 잠시 거실로 나와 창가의 커피 테이블에서 뷰를 감상하며 커피와 다과를 즐기며 아내와 이야기를 나눈다. 그 테이블은 미국에서 보낸 연구년 기간 주말마다 집 근처의 거라지 세일(*각 집의 주차장 혹은 집 앞, 때로는 집 안에까지 자신들의 물건을 전시하며 파는 세일)에서 3달러에 샀던 것이다. 주말이면 아이들 데리고 거라지 세일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거저 얻다시피 하고, 미국인들의 집 안을 구경하는 것이 A교수 가족의 취미였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출근을 위해 정신없이 서둘지 않아도 된다. 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아직은 원고, 강연, 회의 등의 요청이 많다. 퇴직했다고 했더니 매일 몇 통씩 오던 기자들로부터의 전화는 크게 줄었다. A교수는 손자 돌잔치 참석 겸, 퇴직 후 아직 하지 않은 여행 겸 멀리 살고 있는 딸내 집에 갈 계획이다. 2주 정도 다녀올 계획인데 그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정신없이 시간을 쪼개 쓰고 있다. 여행 중에도 원격 강의, 학회에서 요청받은 주제발표 원고를 써야 하는 실정이다. 그의 말을 들은 딸이 묻는다.

“아빠는 언제 한가해져요?”

“혹시 선택이 가능하다면 무덤에 들어간 후에 그리되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재직시절 만큼 정신없이 지내지는 않는다. 과거보다는 훨씬 더 시간 통제가 가능하다. 사람들이 “너무 바쁘시죠?”라고 인사를 건넬 때면 A교수는 늘 웃으며 “할 일은 많은데 바쁘진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바쁜 것은 일과 시간에 쫓기는 것이다. 할 일이 많은 것은 자신이 시간을 통제하며 일을 처리해가는 것이다. 말은 그리하지만 시간 통제는 쉽지 않다. 부탁이 들어왔는데 시간 부족을 핑계로 거절하고 나면, 그쪽에서는 더이상 요청이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와 같은 보통 수준의 프리랜서 경우에는 어지간한 용기를 내지 않고서는 요청을 거절하기 어렵다.

오늘, 일요일 아침에도 A교수는 출근을 했다. 출근이 아니라 그만의 삶의 터전, 놀이터에 온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거동이 가능한 마지막 순간까지 호미를 놓지 않으셨던 것처럼 그도 몸과 정신이 허락하는 한 의미 있는 활동을 하는 것이 바람이다. 그 바람을 위해 늘 근처 강변으로 조깅을 하거나 근처 산으로 새벽 등산을 하기도 한다. 새벽에 다녀온 상쾌한 봄 산 내음과 풍경이 연구실에 앉아 있는 그를 감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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