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 삼박(東國三朴)’으로 불리다
기(奇), 고(高), 박(朴)은 지금도 광주에서 명문가다. 행주 기씨는 고봉 기대승을, 장흥 고씨는 임진왜란 당시 금산에서 순절한 고경명과 두 아들을, 그리고 충주 박씨는 눌재 박상과 사암 박순 같은 큰 인물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박상(朴祥, 1474-1530)은 1474년(성종 5) 광주 방하동(지금의 광주시 서구 서창동)에서 태어난다.

박상 영정(송호영당)

부친 박지흥은 원래 충청도 회덕에서 살았는데,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출사를 포기하고 처가(하동정씨) 마을인 광주 방하동으로 거주지를 옮긴다.

박상이 광주에서 태어난 이유다. 그러나 박상의 어머니는 하동 정씨가 아닌 계성 서씨다. 아버지 박지흥이 방하동으로 이사 온 지 2년 만에 하동 정씨가 죽자, 계성(이천) 서씨와 재혼했기 때문이다.

박지흥과 계성 서씨와의 사이에 세 아들이 태어나는데, 첫째가 박정, 둘째가 박상, 그리고 셋째가 박우였다. 그런데 당시 세 형제의 학문과 문장이 모두 뛰어났다.

송나라 소순과 두 아들 소식(소동파), 소철은 모두 당송 8대가에 선정될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다. 그래서 이들 3부자를 ‘부자 3소’(父子三蘇)라고 불렀다.

이에 견줘 당시인들은 박지흥의 세 아들 박정과 박상, 박우를 ‘동국 삼박’(東國三朴)이라 불렀다.

동국이란 중국의 동쪽에 있는 나라, 즉 조선을 가리킨다. 즉 중국에 ‘부자 3소’가 있다면, 조선에는 ‘동국 3박’이 있었던 셈이다.

동국 3박 중 막내인 박우의 아들은 장원급제한 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역임한 사암 박순(朴淳, 1523-1589년)이다.

-연산군의 장인, 우부리를 격살하다
오늘 광주의 도로명 눌재로의 주인공이 된 눌재 박상은 광주 정신인 ‘정의로움’을 몸소 실천한 인물로 유명하다. ‘우부리 격살’과 ‘신비복위소’가 그 증거다.

박상은 28세인 1501년(연산군 7)에 과거에 급제하고 30세에 병조 좌랑이 된다.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의로운 인물이었다. 그가 의로운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우부리 격살 사건이다.

희대의 폭군이었던 연산군은 팔도에 채홍사를 파견해 미색을 구하라 명한다. 이때 나주에 사는 천민 우부리의 딸이 뽑히게 된다. 얼마 후 우부리의 딸은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후궁(숙용, 종3품)이 된다.

우부리는 딸의 권세를 믿고 남의 전답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온갖 못된 짓을 자행한다. 민심은 흉흉했지만 우부리의 비위를 거스르면 목이 달아났으므로 나주목사도, 전라도 관찰사도 그의 못된 짓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이때 박상은 전라도 도사를 자원해 부임한다. 전라도 도사는 종5품의 관직으로 지방관의 불법을 규찰하는 일을 맡은 관리였다. 박상이 나주에 도착하자 나주 관아의 아전인 이방(吏房)은 우부리리를 찾아 뵐 것을 권한다. 권유를 듣지 않자, 많은 사람들은 앞날을 걱정했다.

박상은 오히려 우부리를 잡아 나주 금성관에서 형틀에 묶은 후 매질해 죽인다. 우부리는 연산군의 장인이었고, 딸이 후궁이었다. 박상은 절대 권력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우부리의 못된 짓을 불의로 간주했고, 그래서 불의를 용납하지 못한 박상이 우부리를 격살한 것이었다. ‘행동하는 양심’, 시대정신의 실천이었다.

왕의 애첩의 아비를 죽인 박상은 우부리의 죄상을 조정에 알리고 당당하게 죄를 청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간다. 그러나 그를 체포하기 위해 내려오던 금부도사와 길이 엇갈렸고, 그 사이 중종반정이 일어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전설에는, 박상이 장성갈재를 넘어 입암산 밑 갈림길에 이르렀는데, 난데없이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야옹 야옹” 소리를 내며 따라오라는 흉내를 냈다고 한다. 박상이 이상하게 여겨 고양이를 따라 큰길을 피해 샛길로 들어가는 사이에 사약을 든 금부도사와 길이 엇갈렸고, 곧바로 중정반정이 일어나 목숨을 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박상은 고양이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의 전답 수십 결을 따로 고양이의 은혜를 갚는 논이라는 의미로 ‘묘답’(苗畓)이라 이름 붙이고, 거기서 나온 소출을 매년 금강산 정양사에 공양했다고 한다.

- ‘신비복위소’를 올리다
신비복위소의 주인공인 중종의 부인 신씨는 비운의 여인이었다. 남편이 왕(중종)이 됐지만, 왕이 됐기에 쫓겨나야 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신씨가 쫓겨나게 된 것은 아버지 신수근과 관련이 있다. 신씨는 연산군 때 좌의정을 지낸 신수근의 딸인데, 공교롭게도 연산군의 부인 역시 신수근의 누이었다.

반정공신인 박원종, 성희안 등은 신수근에게 반정 참여를 권유했지만, 참여하지 않자 격살한다. 그리고 신수근의 딸이 왕비가 되자, 자신들이 위태로워질지 모른다고 생각해 힘없는 중종으로 하여금 신씨를 쫓아내게 한다. 왕비가 된 지 7일만이었다. 중종의 두 번째 부인은 후일 장경왕후가 된 숙의 윤씨의 차지가 된다.

1515년(중종 10) 두 번째 중전이던 장경왕후 윤씨는 훗날 인종이 되는 원자를 낳고 6일 만에 죽고 만다.

이때 담양부사였던 박상은 순창군수 김정, 무안현감 유옥 등과 함께 순창의 강천사 계곡에 모여 각각 관인을 나뭇가지에 걸고 억울하게 폐위된 신씨를 복위시키는 것이 옳다는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한다. 이때 이들이 소나무 가지에 관인을 걸어놓고 맹세한 곳이 삼인대(三印臺)이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올린 신비복위소는 폐위된 신씨의 원통함을 풀어줌과 동시에 복위시키고, 신씨의 폐위를 주장한 반정의 3대 공신인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의 관직을 박탈하고 죄 주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요구였다. 조강지처를 내친 죄, 즉 인륜을 무너뜨린 죄가 조선 왕조를 안정시킨 반정의 공보다 더 크다는 것이, 박원종 등의 죄를 묻는 근거였다. 반정공신들이 권력을 잡고 있던 당시 신비복위소는 목숨을 담보한 의로운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조정은 신비복위소로 인해 격렬한 논쟁에 휩싸인다. 박상은 중벌에 처해질 분위기였으나 조광조 등의 간언으로 전라도 오림역(현, 남평면 소재)으로 유배된다. 조광조 등이 적극 옹호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 상소는 사림들이 다시 결집하게 되는 계기가 됐고, 이어 일어난 기묘사화의 불씨가 된다.

숙종 때 좌절된 신비 복위는 영조 때 이뤄진다. 영조는 중종반정 때 폐위된 신비의 복위 문제를 거론했고, 무려 538명의 전·현직 및 지방 관리와 유생의 의견서를 받았는데, 그 가운데 1명을 제외한 537명이 복위에 찬성한다.

1739년(영조 15), 신비가 폐위된 지 233년 만에 복위가 이뤄지자, 영조는 “아! 황량한 신비의 무덤에 난 풀은 지금 몇 년이 지났는가…나도 모르게 가슴이 아프다”라며 감회 어린 소감을 밝힌다. 시호는 ‘단경’, 능 이름은 ‘온릉’으로 결정됐다.

단경왕후 신주는 중종의 종묘에 모셔졌는데, 세 명의 부인(단경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 중 첫 번째 자리(元后)에 놓이게 된다.

박상이 요구했던 신비의 복위는 당시에는 이뤄지지 못했지만, 영조는 박상 등의 상소를 ‘늠름한 행위였다’고 평가했고, 신비복위가 이뤄진 5년 뒤인 1744년(영조 20), 신비복위소를 올렸던 장소인 순창 강천사 앞 냇가에 삼인대비가 세워진다.

삼인대비(전북 순창군 강천사 앞)

후일 정조는 박상의 제문을 직접 지으면서 “세 사람이 걸었던 그 석대(돌바위)는 만고에 닳지 않으리라”라고 칭찬한다.

- 조광조를 애도하는 만시를 짓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이듬해인 1520년(중종 15) 1월, 정암 조광조가 능성현(화순군 능주면)에 귀양 와 사약을 받는다. 조광조의 시신이 경기도 용인으로 떠나갈 때 박상은 관이 실린 소달구지를 먼발치로 바라보면서 만시(輓詩,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시)를 짓는다.

“무등산 앞에서 서로 손을 붙잡았는데/ 관 실은 소달구지만 바삐 고향으로 가는구나/ 후일 저세상에서 다시 서로 만나더라도/ 인간사 부질없는 시비일랑 더 이상 논하지 마세나.”

이 시의 1절과 2절은 박상과 조광조가 만난 과거와 현재의 인연 이야기이다. 1519년 12월박상은 무등산 앞 분수원(학동 삼거리)에서, 유배돼 내려오는 조광조를 만나 이별을 나눈 적이 있다. 그 이별이 박상과 조광조의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만다. 조광조는 유배온 지 한 달도 채 못돼 사약을 받았고, 그의 시신은 소달구지에 실려 고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박상은 3절과 4절에서, 내세에서 다시 만나더라도 그때에는 인간사 부질없는 시비는 하지 말자고 읊는다. 인간사 부질없는 시비, 이는 그가 겪은 신비복위소 사건과 조광조를 죽음으로 몰고 간 급진적인 개혁정치를 말한다.

1518년(중종 13)에 대사헌이 된 조광조는 중종을 설득해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한다. 소격서를 혁파하고, 향약을 실시했으며, 지식만을 평가하는 과거시험 대신 인성을 중시하는 현량과를 실시한다. 그리고 반정공신들의 공훈을 ¾ 이상 삭탈한다. 이러한 개혁정치는 훈구세력의 반발을 샀고, 결국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조광조는 38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는다.

박상과 박순의 영정을 모신 송호영당(광주시 광산구 소촌동)

박상 시비(광주시 남구 사직공원)

박상 무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광주시 남구와 서구에 걸친 ‘눌재로’는 눌재 박상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한 도로명이다. 서구 사동(절골)에는 그의 생가터와 재실, 묘소가 있고 광산구 소촌동의 송호영당에는 그의 영정과 영의정을 지낸 조카 박순의 영정이 함께 걸려 있다. 송호영당은 1728년(영조 4), 그가 태어난 서창동 절골 마을에 건립된다. 그러다가 1998년 소촌동 100번지 기찻길 옆으로 옮겨진 후,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2008년 현 위치인 소촌동 산85번지로 이전된다. 먼 후손인 용아 박용철 시인의 생가 바로 뒤다. 박상은 조선 최고의 시인이기도 했다.

박상이 몸소 실천한 ‘우부리 격살 사건’과 ‘신비복위소’는 목숨을 건 정의로움의 출발이자 남도인이 늘 시대정신을 앞장서 실천했던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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