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자리잡은 필암서원은 절의와 문장을 겸비한 선비 하서 김인후를 모시고 있다. ‘넓게 텅 비어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확연루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청절당과 숭의재 진덕재 등 각 건축물이 단정하게 들어서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인물 중에서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겸비한 탁월한 이는 그다지 찾아볼 수 없는데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 하서 선생을 종생하여 이 세가지를 다 갖추게 하였다.’ 장성군 황룡면 맥동마을에 가면 거북등에 세워진 비가 하나 있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 하서 김인후를 우러르는 신도비인데, 글은 당대의 논객 우암 송시열이 썼다. 글을 통해 우암은 하서를 절의를 갖춘 선비로 더욱 존경한다. 여느 학자와 다른 품격이 있다는 것이다.

◇절의 지키며 후학 양성 전념
꼿꼿한 선비, 하서 김인후(金麟厚, 1510-1560)는 장성군 황룡면 맥동리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에 천자문을 읽었다는 그는 여섯살 때 ‘하늘’에 대해 이렇게 쓴다. ‘모양은 둥글고 지극히 크고 또 그 끝은 검지요./ 넓고 넓고 비고 비어 땅 둘레를 덮었지요./ 덮어 주는 그 가운데에 만물을 다 담았어요. 사람들은 어찌 무너질까 두려워 하나요.’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닌 그 이치를 제대로 알고 글로 표현한 그의 재능에 사람들은 ‘신동’이란 별칭을 달아줬다.
8살 때 고봉 기대승의 삼촌인 기준을 만나 임금의 붓을 선물로 받았고, 10살 때 전라감사인 김안국을 찾아가 소학을 배웠으며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인 박상, 최산두, 송순에게 글을 배웠다.
22살 되던 1531년 성균관에 들어가 퇴계 이황과 함께 학문을 닦은 후 31살에 문과에 급제했다. 승정원 부정자에 임명된 다음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정7품)가 돼 세자(훗날 인종)에게 도학에 의한 왕도를 강의했다. 당시 세자는 하서를 극진히 아껴 ‘묵죽도’와 새로 간행된 ‘주자대전’을 선물하고 함께 술도 마시며 새 정치를 꿈꾸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경연 검토관이 돼 임금인 중종에게 ‘백성이 잘 살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왕도정치를 펼칠 것’을 강조하는 한편 ‘기묘사화 때 억울하게 죽거나 귀양 간 풍운의 개혁가 정암 조광조 등 어진 사람들을 용서해 줄 것’을 바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중앙 활동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544년 11월,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한다. 그러나 그가 성군의 자질을 발견하고 혼탁한 정치를 바로잡을 것으로 기대했던 인종은 재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생모 장경왕후를 일주일만에 여윈 비운의 왕 인종도 비명에 간 것이다.
다음, 명종이 즉위하자 하서는 옥과현감을 끝으로 36세의 나이에 관직이나 명예욕과 인연을 끊는다. 명종은 홍문관 교리에 임명하는 등 7차례나 벼슬을 내렸지만 인종에 대한 충의를 지키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후손들에게 “명종 이후의 관작은 기재하지 말라”고까지 유언한다.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 이후 김인후는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자연과 시를 벗 삼아 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리곤 고향마을에서 학문에만 정진했다. ‘대학강의발’ 등을 저술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써 송강 정철, 월계 조희문, 고암 양자징, 금강 기효간, 호암 변성온 등 석학을 배출했다.
하서는 오직 인종만 그리워했다. 수많은 시를 통해 그는 인종을 향한 마음을 전달했다. 인종의 기일인 칠월만 되면 집앞 작은 산에 올라가 인종의 무덤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며 하루종일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그를 단순히 대학자로서만 존경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다.
이기동 성균관대 교수는 ‘하서의 의리사상’이란 논문에서 “하서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던 것은 의롭지 못한 정부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고, 그것은 죽음도 불사하고 항거하는 의리정신의 발로이기도 하다”면서 “그는 의리를 통한 크나큰 실천을 한 선비였다”고 평가했다.

필암서원 ‘우동사’

◇퇴계 “학문으로 교유할 사람 하서뿐”
하서는 평생 도학을 바탕으로 수양론·경세론·의리론을 펼쳤다. 그는 안으로는 경(徑)으로써 올바른 마음을 갖고 밖으로는 의(義)로써 올바른 행동을 해 마음과 몸이 일치하는 인격의 성숙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서는 내 몸을 닦고 백성을 다스리는 정신을 근본 삼아 왕도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임금이 덕을 쌓고 어진 신하를 등용하고,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고, 학문을 가르치는데 힘써야 하며 언로를 넓히고 바르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도학에 근본을 두고 백성이 편안하고 근심이 없으며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는 사상을 갖고 민본위민의 경세정치를 실현해야 한다고 왕에게 상소하고 강론했다. 그는 도학을 학문연구로 끝내지 않고 충의와 의리로서 몸소 실천한 것이다.
그의 이런 일관된 태도에 당대의 학자들의 평가는 위대했다. 퇴계 이황은 “학문적으로 교유할 사람은 하서뿐이며 도학 절의는 비교할 사람이 없다”고 평가했다.
율곡 이이는 “하서는 맑은 물에 핀 연꽃이며 화창한 바람과 비 갠 후의 밝은 달과 같고 나아가고 물러남은 우리나라에 비할 사람이 없다”고 칭찬했다.
결국 정조는 김인후를 문묘에 배향토록하고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하나라도 갖추지 않은 것이 없는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다”라고 극찬했다.

필암서원 ‘장판각’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필암서원
황룡면 필암리에 자리잡고 있는 필암서원은 현종 때 ‘필암’이라는 액호를 하사받은 사액서원(賜額書院)이다. 이 곳은 서원 철폐령에 따라 곳곳의 서원이 사라질 때인 조선 말기 대원군 시절에도 전혀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서원은 16세기 이후 사림들에 의해 세워지기 시작한 사립학교이자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데, 김인후를 모신 필암서원은 그의 사후 30년이 지난 선조 23년(1590) 그의 고향인 기산리 황룡강변에 세워진다.
하지만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지자, 인조 2년(1624) 증산동에 복설되고, 효종 10년(1659) ‘필암서원’으로 사액된다. 현종 13년(1672)수해를 피해 현 위치로 옮겨진 이후 건재하고 있다.
서원의 문루인 확연루(廓然樓)는 정면 3칸의 이층 기와집으로 당당한 품세를 자랑하며, 문루의 편액은 우암 송시열이 썼다. ‘넓게 텅 비어있다’는 의미를 품고 있는 확연루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강당인 청절당, 학생들의 기숙 시설인 숭의재와 진덕재가 있고, 인종의 어필 묵죽도(墨竹圖)를 보관하고 있는 경장각도 있다. 그리고 사당인 우동사에는 하서 김인후와 그의 제자이면서 사위인 고암 양자징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다.
장서각에는 보물 제587호로 지정된 60여 건의 고문서가 소장돼 있어 필암서원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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