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는 비옥한 농토와 청정한 바다에서 나오는 풍부한 재료를 바탕으로 음식문화가 남달리 발달했다. 여기에다 푸짐한 인심과 정성어린 손맛은 다른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음식을 창출해 냈다. 한 상 잘 차려진 한정식은 남도 음식문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남도 한정식은 남도 음식문화의 결정체다. 비옥한 평야와 높고 깊은 산, 청정바다와 기름진 개펄에서 나오는 풍부한 식재료 덕분에 남도의 한정식은 육해공 산해진미로 가득하다. 요즘이야 서양식으로 서너 가지 음식이 차례로 상에 올라오지만, 본디 한정식은 한상 가득 푸짐하게 여러 가지 요리를 내어오는 것이다. 다양한 재료와 조리법으로 꾸민 많은 가짓수의 음식이 넓은 상 하나를 가득 메우고도 남는 남도 한정식은 풍요로움 그 자체. ‘상다리가 휘어질 듯 하다’는 말은 이러한 남도 한정식을 표현하기에 오히려 모자란 듯 보인다.

◇풍부한 식재료, 정성의 맛
한정식은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전채, 곡물위주의 주식과 부식(반찬) 및 후식으로 구성된다.
한정식에 이용되는 반찬의 종류는 약 1천500여 종에 달하고, 조리법 역시 다양하다. 반찬은 구이, 전, 볶음, 지짐, 편육, 조림, 생채, 숙채, 튀각, 찜, 전골 등 다양한 방법으로 조리돼 영양과 맛, 색채감, 온도 등 여러 면에서 조화를 이뤄 주식을 보조한다.
특히 임금님이나 대갓집 반상차림을 상업화한 한정식은 예전에는 상차림도 지역별로 제각기 달랐다. 그 중에서도 물산이 풍부했던 남도의 한정식은 양과 질에서 다른 지역을 압도했다.
남도가 맛의 고장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것은 비단 천혜의 자연환경 때문만은 아니다. 자연이 낳은 싱싱한 재료들은 남도 특유의 푸지고, 섬세하고 집요하면서도 풍요로운 상상력을 만나 깊고, 진하고, 오묘한 맛의 음식으로 재탄생된다.
손맛, 땀과 정성의 맛, 곰삭은 발효의 맛이 어우러진 남도 음식을 한데 모은 것이 남도 한정식이다.
입맛을 돋우는 죽이나 퓨전 샐러드 등을 시작으로, 한정식 집마다 다르겠지만 깊고 찰진 홍어삼합, 노릇노릇 맛있게 잘 익은 생선구이, 무나 감자 등 주인공인 생선보다 부재료가 더 맛있는 생선조림, 바삭한 전과 부침, 진한 맛이 잘 배어든 갈비, 철따라 새콤달콤하게 무쳐 내오는 회무침 등. “이제 끝인 듯” 싶으면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나오는 밥과 국, 탕, 김치와 나물, 그 외 여러 반찬까지…. 임금님의 12첩 반상이 부럽지 않은 30첩 반상이 눈앞에 펼쳐진다. 기막힌 맛에 한 번, 많은 양에 또 한번 놀라게 되는 게 바로 남도 한정식이다.

◇남도 특산물로 만든 부담 없는 정식
여러 산해진미를 한 상에 푸짐하게 차리는 한정식도 있지만, 남도에는 지역마다 특산물을 이용해 다양한 요리법으로 한상 그득하게 차린 ‘정식’도 수두룩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꼬막(보성 벌교), 굴비(영광), 흑두부(화순), 게장(여수), 떡갈비(담양) 정식 이다.
쫄깃한 식감에 영양이 듬뿍 담긴 꼬막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1월부터 1월까지가 제철로, 튀김이나 탕수육, 무침, 전, 찜, 비빔밥 등으로 다양하게 요리된다.
굴비정식은 부담 없이 사계절 즐길 수 있어 좋다. 특히 굴비와 찰떡궁합을 자랑하는 것이 녹차 물에 말은 밥인데, 굴비와 녹차물밥의 조화를 처음 맛본 외지인들은 그 맛에 반해 남도에 올 때면 꼭 굴비정식을 찾는다고 한다. 손으로 북북 뜯은 굴비를 참기름고추장에 푹 찍어 녹차 물에 말아 넣은 밥과 함께 먹으면 한두 공기는 기본으로 훌훌 넘어간다.
몸에 좋은 검정약콩(쥐눈이콩)을 갈아 만든 흑두부는 홍어와 돼지고기, 김치와 함께 사합으로, 전골로, 튀김이나 전, 흑두부보쌈 등으로 다양하게 변신한다. 특히 화순에 흑두부정식 집이 많다.
달짝지근한 맛이 일품인 게장은 굴비에 버금가는 밥도둑이다. 여수에서는 주로 돌게로 게장을 담가 게장정식을 내놓는데, 돌게는 꽃게보다 크기는 작지만 껍질이 단단하고 육질이 찰진 것이 특징이다. 뜨뜻한 밥에 짭조름한 게장 국물 한 숟가락 붓고, 잘 발라낸 살을 얹어 먹으면 세상만사 시름을 잊고 오로지 그 맛에 빠져들게 된다.
광주 송정동이나 담양에서 흔히 맛볼 수 있는 떡갈비정식은 또 어떠한가. 만드는 방법이 인절미 치듯 쳐서 만들었다고 해 ‘떡’이라는 글자가 붙은 떡갈비는 다른 갈비요리와는 달리, 갈비살을 곱게 다져 만들어 연하고 부드러운 고기 맛을 느낄 수 있다. 간장, 배즙, 다진 양파, 청주, 설탕, 기름 등을 넣어 끓인 양념장은 재료의 조화 뿐 아니라 정성이 더해져 그 맛이 배가된다.

◇기본 한정식서 퓨전까지 유별난 손맛
남도 한정식은 집집마다 손맛도 다르다. 대를 이어가며 자신들만의 비법을 고수하는 집도 있고, 전통 요리법에 자신들만의 비법을 더해 퓨전, 발효 퓨전 한정식을 선보이고 있는 곳들도 미식가들의 눈과 입을 사로잡고 있다.
궁중음식 연구원에서 익힌 손맛을 전라도 한정식에 접목해 전통 반가의 음식을 내놓는 집이 있는가 하면, 해남의 무공해 황토와 오염되지 않은 암반수를 활용해 만든 황토지장수를 이용한 웰빙 한정식 식당, 음식을 약으로 여기고 정성껏 건강밥상을 차리는 곳, 몇 년씩 푹 숙성한 엑기스로 갖은 반찬을 만드는 발효 숙성 한정식집도 ‘웰빙’ 바람을 타고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
그야말로 남도인들의 유별난 손맛과 고집스런 정성, 기상천외한 상상력이 만나 남도 한정식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남도 한정식’ 세계화 하려면
어느 요리연구가는 “‘조화와 협력’의 형태로 이뤄진 한식은 음식이 차례차례 나오는 시간전개형이 아니라 한꺼번에 한상차림으로 나오는 공간전개형인데 이 기본원칙을 깨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코스식으로 음식이 나오는 것은 양식이나 중식, 일식에서나 하는 방식이지 싱거운 밥, 자극적인 젓갈과 장류, 뜨겁고 차갑고, 질기고 부드러운 음식 등을 기호에 맞게 골라 먹을 수 있게 한 한식의 기본 상차림과는 어긋난다는 말이다.
이러한 한정식의 기본은 한상을 가득 차려 내오는 남도 한정식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때론 푸짐한 남도 한정식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
몇 달 전 만난 독일인 부부는 광주에서 한정식을 접하고, 형형색색의 음식들이 한상 가득 차려진 남도 한정식을 예술품에 빗댔다.
처음 맛본 이국의 음식이 낯설기도 할 텐데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서툰 젓가락질로 이 음식, 저 음식을 맛봤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걱정 섞인 말을 내뱉었다. ‘도대체 이 많은 음식 중에서 먹다 남긴 것들은 어떻게 처리 하냐’는 것. 음식물쓰레기가 너무 많이 배출돼 아깝다는 지적이었다. 그들에게 우리네 실상을 낱낱이 고백하기란 부끄러운 일이라 말을 늘어놓을 수 없었다.
커다란 상에 많은 종류의 반찬들을 늘어놓는 남도식 한식 상차림은 보기에는 좋지만, 때론 만드는 이, 먹는 이 모두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 반찬 가짓수 줄이기를 통해 상차림을 슬림화하거나 남은 음식을 포장해주는 등의 노력이 절실하다.
‘슬로우 푸드’ 열풍으로 한정식으로 눈을 돌린 외국인들의 입맛에 맞춘 메뉴 개발, 푸드스타일링 개발도 필요해 보인다.
이와 함께 전국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남도만의 한정식을 요리하는 스타 요리사들을 양성해 남도의 밥상을 더욱 푸짐하게 만들어 가야할 것이다. /특별취재반
◇특별취재반 ▲이경수 사회부장 ▲오성수 논설위원 ▲김재정 사회부 차장 ▲김기식 사진부 차장 ▲정다운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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