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야, 저것이야?” “할거야, 말거야?” 친절하게 묻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가혹한 추궁이고 다그침이다. 아도르노(Th. W. Adorno)가 말했듯 지배자는 언제나 참과 거짓, 옳음과 그름, 좋음과 나쁨, 예쁨과 추함, 삶과 죽음, 건설과 파괴, 질서와 혼동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독촉한다. 그러나 피지배자에겐 선택의 권리가 없다. 그는 오직 지배자가 제공하는 기준에 따라 뒤 것을 버리고 앞 것을 취해야 한다.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르통(A. Breton)은 이처럼 양자택일의 논리로 관철되는 지배방식에서 벗어나려면 과감하게 자기모순을 저지르라고 주문한다.

영화 ‘8과 2분의 1’의 주인공 귀도는 잘 나가는 영화감독이다. 그는 핵전쟁 이후 살아남은 이들이 새로운 행성을 찾아 떠나는 SF영화를 계획하고 있지만 아직 뚜렷한 기획안이 마련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제작사는 구체적인 기획서와 시나리오를 요구하며 하루 빨리 촬영에 들어가자고 압박한다. 요양지로 도망쳐보지만 영화 관계자들이 몰려들어 압박을 강화한다. 배역도 정하지 않은 채 캐스팅된 배우들은 비중 있는 배역을 얻기 위해 달려들고, 프로듀서는 대중적 영화를 만들라고 요구한다. 게다가 비평가는 아직 촬영하지도 않은 영화를 혹평한다. 귀도는 주변의 평가와 요구를 외면하지도 그렇다고 자신의 구상을 수정할 마음도 없다. 순종과 저항 사이에서 방황하는 동안 그의 삶이 그렇듯 촬영 또한 끝없이 지연된다.

귀도는 자신이 원하는 것과 주변에서 요구하는 것 사이에서 부유한다. 어린 시절 그는 마을에서 떨어진 움막집에 살던 미치광이 여인의 몸에 호기심을 갖지만 그녀를 악마로 치부하는 가톨릭의 도덕관에 떠밀려서 방황하는 삶을 산다. 우주선을 발사하는 세트장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제작사를 배반하듯 그의 시나리오는 유년시절을 맥락 없이 회상하는 쪽으로 치닫는다. 제작사, 비평가, 배우, 그리고 대중이 요구하는 것과 자신의 구상이 점점 멀어져가는 데서 오는 괴로움을 잊기 위해 정부와 아내를 차례로 촬영지에 불러오지만 불일치의 고통은 해소되지 않고 커져만 간다. 아내와 정부 사이를 배회하는 동안 제작사는 영화제작 발표회를 열어 그를 궁지로 몰아세운다. 그 사이 외도를 알아챈 아내는 거짓말쟁이 귀도에게 거짓말 덩어리인 영화나 만들라고 비난한다.

영화 ‘8과 2분의 1’을 만든 페데리코 펠리니(F. Fellini)는 신사실주의의 세례를 받았다가 초현실주의로 전향한 감독이다. 아마도 그가 지향한 초현실주의는 세상의 온갖 모순들이 해소되는 ‘정신의 한 점’을 찾아가는 여행처럼 보인다. 환상과 현실이 뒤엉킨 마그리트(R. Magritte)의 그림처럼 ‘8과 2분의 1’은 감독의 무의식과 바깥의 현실 세계를 들락거린다. 하늘을 날다 바다로 추락하는 꿈을 꾸고, 마술쇼를 보다 유년시절의 기억으로 빨려들고, 아내와 정부가 사이좋게 춤을 추는 환상이 그려진다. 자신을 조롱하는 비평가의 목을 매달았는데 다시 그와 대화를 이어가고, 권총 자살을 했지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삶을 이어간다.

이처럼 현실세계와 가상세계의 경계가 모호한 영화에서 진짜를 찾기 위해 환상을 걷어내면 오히려 가짜만 남는다. 초현실주의에서 진짜는 모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모순을 저지르며 모순이 해소되는 극점을 찾아가는 환상 속에 있다. 촬영중단까지 선언했던 귀도가 다시 등장인물들을 모두 소환해서 서로 손을 맞잡고 둥글게 원을 도는 환상을 꿈꾸는 데서 영화가 끝나는 까닭일 것이다. 이렇게 영화 ‘8과 2분의 1’은 각성된 도덕적 의식과 미학적 규범을 깨뜨리려는 무의식의 투쟁이자 꿈이 된다.

※‘시네필로’는 철학적 지점에서 영화를, 영화적 지점에서 철학을 말하고 묻는 해와문화예술공간의 인문학기획으로 매주 수요일 퇴근길 운림동 숙실마을 해와 소극장에서 자유대학과 지식강좌의 하나로 진행하고 있다.

/최송아(전남대 철학연구교육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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