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연쇄살인마' 유영철 사건에 이은 열대야로 온 국민들이 잠못이루는 밤이 계속되는 동안 정치권은 드디어 그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도 '국가 정체성' 논쟁이라는 어마어마한 주제를 내세우며 '전면전'을 준비중인 것이다. 화합과 상생의 정치를 하겠다는 정치권에 대해 사실은 일말의 기대조차도 하지 않은 국민들이다. 하지만 제17대 국회 개회와 함께 산적한 현안은 뒷전으로 미룬채 밥그릇 다툼을 벌이던 여야가 이제는 '전쟁'을 시작하겠다는데 대해서는 정말 기막힐 뿐이다.

　전면전 준비중인 여야
　예전의 야당 대표 답지않게 민감한 정치적 사안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발언을 자제하며 "달라졌다"는 평가까지 받았던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뜬금없이 "전면전을 선포할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고 나선 이유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헌법에 규정된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훼손되면 다른 것은 기대할 수 없다"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개혁방향이 틀리지 않았느냐. 개혁의 목표가 변질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면전 선포 '가능성'의 이유를 설명하기는 했다. 하지만 전쟁을 걸어온 박 대표의 발언을 "개떡같은 소리"라고 맞받아친 열린우리당의 주장처럼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이 자신의 부친인 고 박정희 대통령을 겨냥한 것이라고 오판한데 따른 감정적 반발 내지 당내 리더쉽 강화를 위한 정략적 대응은 아닌지 자못 의심스럽다. 의심이 사실이라면 국가보안법 개폐 움직임, 송두율씨에 대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무죄판결, 의문사진상규명위의 간첩·빨치산 민주화 기여 판정, 북한 함정의 서해북방한계선(NLL) 월선 및 보고누락 사건 등 연이어 터진 일련의 안보현안들이 그같은 감정적 반발 내지 정략적 대응의 좋은 계기였을 것이다.

　국가정체성 논쟁 필요한가
　어쨋든 한나라당이 전면전 준비에 들어감에 따라 상생의 정치는 예상대로 시작도 못해보고 물건너 갔다. 과반수 의석을 점한 집권여당이면서도 참여정부의 최대 지향점이기도 한 '개혁'에 대해서는 당내는 물론 당·청간에도 한 목소리를 내지못해온 열린우리당이지만 야당의 공세가 전면전이니 만큼 이번에는 일치단결해 가고 있다. 박 대표의 국가정체성 언급에 대해 "70, 80년대 독재시대 대중을 선동하는 우중정치이자, 포퓰리즘 정치"라고 반박하는가하면 '딱지부치기식 색깔론' 공세라고 맹공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역시 야당 대표의 발언을 문제삼아 색깔론과 역색깔론 공세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상황이 국가정체성 논쟁이 필요한 때는 결코 아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일련의 안보현안들을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뒤흔든 전면전할 사건으로 규정하는 것은 볼썽 사나운 막말공세일뿐이다. 온 나라가 각종 현안을 둘러싸고 국론분열양상까지 보이고 있는 지금 여야가 해야할 일은 대화를 통해 난국을 수습하고 매듭을 풀어가는 일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보수와 진보는 상생해야
　사실 우리 사회는 보수와 진보의 구분도 애매할 뿐더러 양립하기 조차도 어렵다. 더 정확히 말하면 보수와 진보의 구분이 없다고 봐야 옳다. '극우'에서 볼 때 타도해야할 '극좌'만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이데올로기의 스펙트럼'은 도저히 서로 공존하기는 어렵고 척결해야 분이 풀리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최근 일련의 안보현안들에서 보듯 여야가 다짐한 상생의 정치가 걸핏하면 색깔론이라는 엉뚱한 '이념의 푸닥거리'에 파묻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더구나 참여정부의 개혁방향에 대해 국가정체성을 뒤흔드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색깔 딱지 부치기'에 불과할 뿐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인 자유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낌새는 이념적 지향점이 애매한 열린우리당 뿐 아니라 진보세력으로서는 최초로 원내진출에 성공한 민주노동당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야가 스스로 진보와 보수라고 자처한다면 두개의 이념 자체는 상생과 경쟁의 개념이지 서로가 투쟁과 전면전을 치러서 척결해내야할 대상이 아니라는 기본부터 다시 배워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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