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대회전(大會戰)'
이춘성 논설실장

국가 정체성을 놓고 '국지전'을 펼쳐오던 여야가 급기야 '전면전'에 돌입했다.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이 선친인 시게미쓰 구니오(重光國雄 신상묵씨의 창씨 개명 이름)의 친일행적을 대신 사과하며 과거사 청산을 위한 성전(聖戰)의 제물로 의장직을 바친 것이 그 도화선이자 선전포고다. 후손들에 의해 시게미쓰 오장(伍長)과의 끈끈한 우애가 확인된바 있는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 박정희씨의 창씨 개명 이름) 소위를 아버지로 둔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가 맞불을 놓아야 하는 것은 대한민국 정치사(政治史)로 보면 당연한 순서. 거대 야당의 대표답계 그녀는 노무현 대통령의 과거 청산 제의에 용맹하게 응하는 대신 친일뿐 아니라 해방 후 친북·용공활동을 했던 사람들까지 낱낱이 파헤치자고 물귀신도 기가막힐 결사항전의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성전(聖戰)과 결사항전 준비끝
이쯤되면 신 의장의 사퇴로 과거사 전반에 대한 도덕적 우위를 확보했다고 자부하는 여당이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의혹과 유신독재에 대한 어떤 공격도 감내하겠다며 불퇴전의 의지를 가다듬은 야당 모두 '과거사 대회전(大會戰)'을 제대로 치를 준비가 끝난 셈이다.
하지만 박 대표의 과거사 진상조사위 조건부 수용으로 전면전의 방법은 정해졌으나 여야의 전력상 그 결말을 점치기는 힘들다. 오랜 경제난에 이번에는 고유가까지 겹쳐 먹고 살기조차 힘든 국민들의 고충이 무색할 정도로 연일 신문·방송의 톱뉴스를 장식하고 있는 과거사 청산이라는 '시대정신'을 훑다보면 그래도 여당이 조금은 우세한 것도 같다.
열린우리당에는 신 의장이 자신 스스로를 성전을 앞두고 바쳐진 제물로 묘사하며 백의종군(白衣從軍)을 선언했고, '14년 비주류' 정치역정의 이부영 신임 의장까지도 백의종군을 선언하는 등 계급장을 결연하게 떼고 싸움터에 나선 이들이 많다. 특히 음참마속(泣斬馬謖)에 서슴이 없고 툭하면 대통령직과 정권의 명운을 거는 것으로 유명한 노 대통령의 탁월한 전술전략이 뒷받침하고 있는데다 숫적으로도 우세하다. 이부영 의장이 '원외'라는 한계 때문에 '비당권파'와 손잡는 등 내부역학구도를 흔들어놓는 일만 벌이지 않는다면 해볼만한 상황이다. 이 의장이 친일 과거사 규명과 관련해 마치 신 전 의장의 울분을 달래듯 '일본군은 소위에서 오장(하사), 경찰은 경시에서 순사까지 그 조사대상범위를 넓힐 것'을 검토하면서 박 대표의 친북·용공 행위 포함 제의를 일축한 것을 보면 열린우리당의 내부역학구도는 그런대로 큰 변화는 없을 것도 같다.

관전(觀戰)자세는 인내심과 체념
잘못된 과거사를 되짚어보자는 요구에 '물타기'의 고전(古典)인 '용공'과 '친북'이라는 녹이 슨 보검을 빼든 한나라당도 결코 만만치는 않다. 박 대표의 친북·용공 행위 포함 제의는 노 대통령의 장인을 겨냥한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박 대표의 제의가 갖고 있는 폭발력은 그의 선친시절 너무나도 확연하게 그 성능이 입증된바 있어 과거사 규명이라는 본분을 넘어 국민들까지 이념적으로 분열시킬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섬뜩하기까지 하다. 식상해져 있기는 하지만 여야가 워낙에 갈등국면인지라 색깔딱지 붙이기가 어떤 위력을 발휘할지 아무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특히 야당내에는 색깔론에 정통한 저격수들이 많이 포진해있다. 이들이 전면에 나선다면 여야 모두에는 읍참마속 당하고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해야할 제물(祭物)들이 즐비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과거사 소용돌이가 이렇듯 사생결단의 위험수위에 있는 만큼 국민들은 이제 여야에 대고 "경제를 살려달라"고 더 이상 사정도 할 수가 없게 됐다. 개혁과 과거사 청산을 시대정신으로 내건 정부나 여야 모두 죽어가는 경제를 살릴 형편이 도저히 아니기 때문이다. 불쌍하기 짝이 없게 된 것이 우리 국민들이지만 현재를 발목잡고 있는 과거를 털어내는 것이라니 어렵지만 참고 결말을 기다려 보기는 하자. 대신에 여야의 역사전(歷史戰)이 현재뿐 아니라 우리의 미래까지도 암울하게 만들지도 모르기 때문에 눈은 부릅뜨고 있어야 한다. 참고 또 참아내다가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면 온갖 욕설을 마구 퍼부어댈 것이 있다. 이승만 정권시절의 '반민족특위', '국가보안법', '제17대 국회', '상생의 정치' 등등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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