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르크 꼴랭쿠흐 역 뒤 계단을 오르면 생 뱅상 묘지로 가는 길이 보인다.

■ 다르게 본다는 것, 익숙한 것의 낯설게 보기

몽마르뜨 언덕은 낭만적인 파리를 상상할 때 에펠탑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랜드마크일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많은 이들은 몽마르트의 본래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일부분만을 보고 간다.

▶2004 전남대 건축공학박사 ▶2005-2007 전남대 post-doc/청주대 post-doc ▶2009-2011 전남대호남학연구원 HK연구교수 ▶2014-현재 Paris 8대학, 도시계획 박사과정

파리라는 도시는 사실 비가 올 때, 맑은 날 또는 어떤 방향에서 접근하느냐에 따라 가슴에 각인되는 풍경의 서사가 다르다. 특히 몽마르뜨 언덕은 어디에서 접근하느냐에 따라 다른 인상을 받게 된다. 대부분 많은 관광객은 지하철 2호선 앙베(Anvers)역이나 12호선 아베스(Abbesses)역에서 내려서 사크레쾨르 성당의 정면을 보면서 접근한다. 이 동선은 기념품을 판매하는 호객꾼들과 야바위꾼들 사이를 헤쳐가야 한다. 이것이 싫다면, 비교적 한산한 지하철 12호선 라마르크 꼴랭쿠흐(Lamarck-Caulaincourt)역에서 내려서 몽마르트 언덕을 둘러보기를 권한다. 익숙했던 길을 버리고 낯선 길로 떠난 몽마르뜨의 새로움을 만날 것이다.


■ 예술과 정치 풍자 실험실 ‘카바레’

라마르크 역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예쁜 나선형 계단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파리의 지하철역에 비해, 플랫폼이 상당한 깊이의 지하에 있다는 점을 유의! 무릎이 아픈 이들은 엘리베이터 타기를 권한다. 계단을 얕보다가 다리가 아플 수도 있다는 점을 주의하자.

라마르크 꼴랭쿠흐 역에서 나와 등 뒤의 계단을 다 오르고 나면, 좌측은 생 뱅상 묘지, 우측으로는 몽마르트 묘지로 가는 길을 만나게 된다. 생 뱅상 거리를 걷다 보면 조그마한 포도밭이 나온다.

몽마르뜨 언덕 경사지에 위치한 포도밭. 파리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파리시가 관리하는 이 포도밭은 양지 바른 완만한 경사지에 있으며, 현재도 약간의 포도주 생산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도시 개발 흐름에 밀려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기 전까지 몽마르트는 수도원과 공동묘지, 포도밭이 주를 이루던 조용한 곳이었다.

포도밭 건너편에는 라팽 아질(Lapin agile)이라는 카바레가 있다. 몽마르뜨 언덕에는 최초의 ‘예술, 정치 풍자의 카바레’인 ‘샤 누아르(Chat noir·1881년)’를 시작으로 물랑 루즈(Moulin rouge·1889), 라팽 아질(Lapin agile) 등 많은 카바레가 모여 있다.

라팽 아질은 초현실주의의 시초를 열었던 시인 막스 자코브부터 입체파 화가 피카소에 이르기까지 많은 화가와 작가들이 모여서 대화하고 즐겼던 선술집이며, 에디뜨 피아프도 이곳에서 노래를 불렀다 한다. 피카소의 ‘라팽 아질에서’(Au Lapin agile·1905) 라는 그림도 전해진다. 이곳에서 입체파, 초현실주의에 대한 토론이 펼쳐졌을 것을 상상하니, 문득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를 몽마르뜨 언덕으로 소환하고 싶어진다.

라팽 아질은 재빠른 토끼라는 뜻이다. 원래 1869년 살인 청부업자의 카바레(Cabaret des Assassins)라는 이름으로 출발했으나, 화가 앙드레 질(Andre Gill)이 이곳의 벽에 냄비에서 뛰쳐나오는 토끼 그림을 그리면서 ‘Lapin a Gill’(질의 토끼)로 바뀌었다가 그 뒤 곧바로 라팽 아질로 바뀌었다.

피카소와 에디뜨 피아프가 거쳐간 몽마르뜨 언덕 아래 위치한 라팽 아질 카바레.

카바레 하면 많은 이들은 보통 물랑 루즈의 화려한 성인 쇼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본래 카바레는 프랑스에서 살롱이 쇠퇴한 후 19세기에 작은 카페에서 샹송을 통해 시대적 상황이나 정치적 풍자와 항의하는 내용을 표현하는 곳이었다.

점차 술과 음식이 제공되고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형태의 극과 음악을 공연하기 시작하면서, 카바레의 의미는 ‘오락 중심의 카바레’와 예술가들에 의해 공연을 위주로 한 ‘예술 카바레’, 단막극과 희곡작품 패러디가 중심이 된 ‘문학 카바레’, ‘정치 풍자 카바레’ 등 다양하게 분화됐다.

19세기 프랑스의 카바레는 공연과 문화, 토론, 정치와 풍자의 실험장이었다. 몽마르뜨 언덕 아래쪽에 위치한 라팽 아질은 ‘예술 카바레’로서의 정체성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월요일을 제외한 밤 9시부터 새벽 1시까지 공연이 이어진다. 그리 크지 않은 공간에서 음료 한잔과 공연 관람료가 포함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피아노 연주, 샹송 가수들의 공연을 즐길 수 있다.

성당 뒤편 정원의 한가로운 오후 풍경.

■ 세계 최초 노동자 정부, 파리 코뮌

생 뱅상 거리의 끝부분 쯤 라 본느 거리(Rue de la bonne)와 만나는 지점에 광장(Square Marcel Bleustein Blanchet)이 있다. 이곳은 관광객보다는 산책하는 주민들과 오후의 햇볕을 누리는 아이들의 청량한 소리로 가득 차 있다.

광장의 벤치에서 보는 사크레쾨르 성당은 더욱 장관이다. 성당의 정면만을 봤다면, 당신은 몽마르트를 다 본 것이 아니다. 성당 뒤편을 한번 돌아보길 바란다. 정면이 단아한 얼굴이라면, 성당의 뒷면은 다이나믹하다.

몽마르뜨의 ‘몽’(mont)은 ‘산, 언덕’이며, ‘마르뜨르’(martre)는 ‘순교자’이다.

이들 단어가 의미하듯 ‘순교자의 언덕’이라는 의미이다. 약 130m 높이의 몽마르뜨 언덕은 파리시에서 가장 높은 곳이며 19세기까지 군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였다.

1870년 파리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나폴레옹 3세 당시 프랑스와 프로이센 전쟁의 패배 이후, 항복을 인정하지 않은 민중들은 파리에서 국민방위군을 결성하고 결사항전을 선언했다. 당시 파리를 뺀 프랑스 전역을 점령한 프로이센 군대에 포위된 채 파리는 프랑스 내에서도 고립됐으며, 극심한 기아와 추위로 고통받았다.

사크레쾨르 성당 앞 계단에서 연주를 감상하는 여행자들의 모습. 몽마르뜨 언덕은 예술인 모두에게 열려 있는 극장이다.

1871년 독일과 휴전조약을 체결한 제3공화정의 임시정부는 혁명의 도시 파리를 버리고 베르사이유에 정부를 옮겨 세웠다. 전쟁으로 인한 고통은 그대로 민중에게 전가됐다. 당시 프랑스 지배자들은 군대의 무장을 해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파리 내부에는 노동자들이 중심이 됐던 방위군이 무장한 채로 많은 대포가 배치돼 있었던 몽마르뜨 언덕 위에 주둔하고 있었다. 독일에게 항복한 프랑스 지배자들은 항복에 반대하는 파리를 위험한 적으로 봤으며, 이에 파리 시민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민중의 힘으로 국가 권력을 무너뜨린 경험이 있던 파리 시민은 노동자가 중심이 된 파리 코뮌을 세웠다. 파리 코뮌의 최초의 전투는 바로 이 몽마르뜨 언덕에서 이뤄졌으며 이때 친 코뮌군 전부, 그들의 피가 이곳에 뿌려졌다. 정부군은 파리 코뮌의 급진성에 대한 공포심과 증오를 창과 방패 삼아 ‘피의 일주일’로 불리는 파리 비무장 시민과 코뮌군의 대학살을 자행했다.(광주 민주화운동의 일주일을 이 사건과 빗대기도 한다.)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도 이 시절 파리에서 이를 목격했다. 국가 권력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고 희생된 이들. 사크레쾨르 성당은 이렇게 피 흘리며 쓰러져간 민중들의 성난 영혼을 잠재우기 위해 세워졌으며 급진주의자들의 반란을 두려워한 부르주아들이 이를 차단하기 위해 건립된 것이라 한다.

과거 채석장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몽마르뜨 언덕.

성당 건립은 파리 코뮌의 희생자들에게는 모욕이 아닐 수 없다. 이때까지 몽마르뜨 언덕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유흥과 환락의 도시, 예술가들의 아지트가 아니라 공동묘지와 오래된 성당, 그리고 포도밭이 있던 파리 외곽의 조용한 장소였을 뿐이다. 파리 코뮌의 저항과 패배 이후 몽마르뜨는 변화를 맞이했다.

물랑 루즈, 유흥가, 화가들의 흔적, 상업 장소로 가득 차 있는 현재의 몽마르뜨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가는가? 파리에서 예술적 낭만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몽마르뜨 언덕에 올랐다면, 민중의 고통을 외면한 국가권력에 항거했던 ‘세계 최초 노동자 정부’, ‘파리 코뮌’이 저항했던 격전지 몽마르뜨 언덕에서, 이들의 좌절된 꿈과 외침에 한번쯤 귀 기울여보자. 그리고 이들, 저항의 정신적 유산이 이어졌을 예술혼과 정치 풍자의 실험장소였던 카바레에서 예술인들의 자취를 살펴보자.

파리에서 가장 높은 몽마르뜨에서 도시 풍경을 바라보려니, 문득 현재 한국의 국가권력과 시민의 대치 상태가 몇 달째 지속되고 “탄핵 인용 시 아스팔트는 피로 물들 것”이라는 법정에서의 그 누군가의 말과 씁쓸하게 오버랩된다.


■ 모두에게 열려 있는 예술극장

성당의 정면은 언제나 자주 본 곳이기 때문에 오늘은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광장의 왼쪽으로 가게 되면 언덕을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계단을 내려오니 언덕 아래 골목길 사이로 보이는 사크레쾨르 성당을 스케치하는 화가들이 모여 있다. 특히 동양인 화가들이 눈에 띈다.

이날은 모델의 화보 촬영이 있던 날이었나 보다. 골목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델을 스케치하는 것인지, 골목길 틈사이로 보이는 풍경을 스케치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자리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뒷모습도 산책하는 이에게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몽마르뜨 언덕에 오르면, 날씨 좋은 주말은 아마추어 가수나 뮤지컬 가수들과 같은 많은 아티스트들이 나와 공연을 하는 모습을 보며, 활기찬 몽마르뜨 언덕을 볼 수도 있다. 몽마르뜨는 모두에게 열려 있는 예술인들의 무대이며 누구나 자연스럽게 관람할 수 있는 예술극장이다.


■ 도시 역사의 결을 간직한 언덕

폴 알베르 거리의 끝 지점엔 알록달록한 의자들이 시선을 사로잡는 레스토랑이 있다. 이름은 ‘완만한 경사지에 있는 여름’(l’ete en pente douce)이라는 카페다.

이 경사지를 내려오면, 현재 생 피에르 시장이 보인다. 이곳은 포목점 시장이다. 수많은 천들, 재단을 할 수 있는 다양한 재료(단추, 지퍼, 벨트) 등을 판매하고 있다. 이곳과 인접한 곳에는 과거 채석장이었던 도시의 흔적을 목격할 수도 있다.

익숙하지 않았던 시각으로 접근한 몽마르뜨의 산책길에서 우리가 알고 있던 화가들의 고향, 그리고 향락의 장소가 아닌, 민중의 저항과 피의 역사 위에 세워진 성당, 그리고 도시 개발에 소외된 예술가들의 운집으로 태어난 카바레와 아뜰리에를 목격하는 경험은 또 다른 시각의 몽마르뜨 읽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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