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대 시사평론가 / 5·18기념재단 설립동지회 회원

지난 주말 서울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을 찾았다. 화창한 날씨에 관람객이 북적였다. 다름아닌 피카소(1881-1973) 탄생 140주년 특별전이 열린 때문이었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온 가족들이 상당수에 이르렀다. 어린 시절 유명작가의 작품을 직접 감상하고 설명을 듣는 것은 행복일게 분명하다. 미술관측은 입장객 수를 제한했다. 스마트폰 앱을 통해 대기자로 등록하고 순서가 되면 줄을 서서 입장하는 방식이었다.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에 가장 널리 알려진 미술사의 거장 중의 한 명인 피카소 작품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는 관심이 열기로 이어진 듯 하다. 눈에 띄는 작품은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이었다. 미술관은 이 작품을 전시 동선의 하이라이트 부분에 배치했다. 대학시절 읽었던 한 역사책의 표지에 실려 인상 깊게 본 기억이 있다. 당시에 정말 신기했다. 세계적인 대가가 동아시아 끝자락에 있는 한국이라는 가난한 나라의 전쟁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에 대해.

회화 뿐만 아니라 도자기와 조소도 여러 점 출품됐다. 도자기 역시 회화와 마찬가지로 피카소의 창의적 시각과 예술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청동의 조소도 구상에서 비구상을 아우르는 독특한 조형미와 생동감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다. 짧은 식견으로 생각해보면 피카소의 위대성은 미술의 추상화 여정에 기여한데서 비롯됐다. 그는 화가로서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고 했다. 피카소 예술의 모든 것은 그 말에 담겨있다. 전시회에 나온 회화, 도자기, 조소 등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원칙은 “내가 생각하는 것을 형상화 한다”는 것이다. 예술가로서의 창의성, 천재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또한 역사의 현장에 선 인류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작품으로 형상화하여 고발하기도 했다. ‘한국에서의 학살’(1951)이나 스페인 내전을 다룬 ‘게르니카’(1937), 나치독일의 죄악상을 그린 ‘시체 안치소’(1944-1945)등 반전(反戰) 3부작이 그 대표적이다.

그가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점을 들어 전쟁의 참상을 다룬 그의 작품들을 이념적으로 문제 삼는 것은 옹졸하다. 인류애 관점에서 이념이란 장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껍데기에 불과하다. 인류의 마음을 울리는 작품이 아니었다면 사소한 이념적 논쟁만으로도 그의 명성은 무너졌을 것이다. 실제로 피카소의 작품 ‘한국에서의 학살’은 당시 한국 전쟁으로 냉전 분위기가 고조되던 미국에서 맹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전쟁에서 미군의 학살을 고발하는 일종의 프로파간다 작품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에서의 비판적 분위기로 인해 피카소의 작품은 한동안 미국의 전시회에 초대받지 못했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좌우의 대칭 구도 속에 공포와 절망감으로 겁에 질려있는 시민들에게 중세기사의 갑옷을 입은 듯한, 기계인간을 형상화한 군인들이 총과 칼을 겨누고 있는 장면을 담았다. 미군의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하기는 어려운 사이보그 군인의 이미지다. 겁에 질린 시민들의 모습은 우리 한국인들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소녀의 이미지가 그렇다. 그러나 작품의 배경 이미지는 간소하여 한국의 산야라고 특정하기는 어렵다. 이 작품을 둘러싼 당시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특정 국가 군인들의 부정적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프로파간다에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은 위대한 작품에 대한 폄하다. 어찌 보면 전쟁 기계(War machine)에 의해 학살 당하는 보편적 인류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전쟁의 잔인함과 참혹함을 고발한 것이다. 이를 통해 반전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작품이라는 것이 더 합당하다.

현대 미술사의 거장이 한국과 관련해 남긴 이 대작을 우리나라에서 구입해 우리가 언제든지 관람할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피카소에 열광하는 전 세계의 미술 애호가들의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을 성 싶다. 피카소의 유일한 한국 관련 작품이 한국에 있다는 것은 피카소 마니아들도 좋아할만한 일이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오기를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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