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9(수)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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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지붕을 사이에 두고 끼니때면 자욱한 연기 속에 된장국 끓인 냄새며 친구를 부르는 소리만으로도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있을 만큼 가깝게 살았다. 무슨 남자애가 그렇게 숫기가 없었는지 엄마의 심부름도 제대로 못 하고 학교에서도 항상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만 다녔다. 지금 생각해도 함께했던 기억은 전혀 없었던 우리는 진학을 하면서 내일도 다시 볼 것처럼 그냥 헤어졌다.
인생 고갯마루에서야 동창회를 한다는 연락이 왔었다. 불현듯 반가웠고 30년 만의 만남은 처음엔 남의 발을 밟았을 때처럼 알아보지도 못했다. 전혀 낯선 곳에서 처음 본 사람 같았지만 어딘지 옛 모습들이 언뜻언뜻 보였고 우리 모두는 초등학교 시절로 TV 화면 바뀌듯 순식간에 돌아갔다.
바람에 나뭇잎 날리듯 무수한 추억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면서 누구는 누구를 좋아했고 논두렁에서 똥 싸다 굴렀다는 얘기며 학교길이 멀었던 한 친구는 어쩌다 늦은 시간, 집에 가는 길에 귀신에게 홀려서 사흘이나 결석했다는 등 어떻게들 지금까지 참았는지 신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내가 좋아했던 한 친구는 시내 학교로 전학을 갔던 터라 그 자리엔 없었다.
그때의 일이 계기가 되어 두절 되었던 소식이 열리고, 수년 동안 꾸준히 동창회는 이어졌다. 그때마다 잘 다녀오라는 남편의 허락은 마냥 고맙기까지 했고 서울에 사는 친구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모교가 있는 고향으로 동창회에 간다는 자체가 설레고 즐겁기만 했다. 그러면서 제일 가까이 살았던 그 친구와 이런저런 삶의 계획까지도 스스럼없이 나누게 되었다.
사람의 일은 한 치 앞을 모른다 했든가, 무슨 운명이었는지 나는 뜻밖에 남편과의 사별을 겪는 황망한 절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사방을 둘러봐도 늪 속이었던 그날,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자존심 따윈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고민의 보따리를 친구에게 풀면서 하나만 물었다.
“나, 광주로 내려가도 돼?” 그는 단호한 대답으로 “그냥 와부러!”라며 아내와 함께 내린 결론이라 했다.
이젠 귀향하여 정착한 나로서는 긴 세월에도 당산나무처럼 묵묵히 서 있는 친구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때론 울적한 마음에 마루 끝에 서서 광주호수를 내려다볼 때면 감나무 사이로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거기서 뭐 해?” 환청으로 들리는 한마디에 무거운 마음은 사라지고 등 뒤에 무등산이 그런 나를 보고 빙그레 웃는듯하여 쑥스러울 때가 있다. 모든 잡념이 정리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친구는 오늘도 산책하러 가자며 밖으로 나오라는 전화를 한다. 시계를 보니 밤 10시도 넘은 시간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그랬듯이 시간에 개의치 않는다. 농사일에 바쁜 친구는 이 시간이 그래도 가장 여유로운 휴식이란다.
가사문학관과 소쇄원을 지나 남면 초등학교를 돌아오는 길에 자판기 커피라도 뽑는 날은 두 시간도 더 걸린다. 많은 얘기를 나눴다기보다 많은 것을 보는 날이다. 마을마다 솟대처럼 서 있는 가로등, 그들을 보듬고 있는 부드러운 산등선, 간간이 들리는 개 짖는 소리, 이러한 밤 풍경은 마음을 한없이 조촐하게 만드는 말씀 없는 스승이 된다. 산책이야말로 내 안에 수시로 일어나는 욕망의 가닥들을 잠재우기 위한 우회적인 방편은 아닐까. 늘 그랬듯이 타닥타닥 지팡이로 소리를 내며 앞서가다 뒤에 가는 우리를 보고 빨리 오라며 돌아본다. 혹여 밤길에 도로 위로 나올지 모를 뱀을 쫓는 자상함에서 그의 아내가 슬쩍 부러움이 느껴질 때다.
아이들이 일곱이나 되는 대가족의 가장답게 대기만성인 친구는, 일찍부터 자녀들의 교육으로 삼았을까. 젊은 날엔 늦깎이 학생으로 중어중문학도 공부했지만, 지금은 산업기사에 도전 중이며 이미 공인중개사와 ‘훈장’이라는 국가 공인이기도 하다. 항상 졸졸 흐르는 우물처럼 글짓기를 하라는 ‘涓井(연정)’도 그가 지어준 격려의 필명이다. 몸에 맞지 않는 화려한 옷을 입은 듯한 부담도 있지만 솔직히 버팀목처럼 든든해서 좋다.
내 방 창문의 불빛을 보고 그는 작은 경적으로 귀가를 알리며 지나간다. 오늘은 “글 써?” 하고 묻는, 어쩌면 무언의 채근은 아닌지.
“아줌마 전데요 저의 집에 잠깐 오세요.” 그 친구의 일곱 자녀 중 넷째의 전화를 받고 가보니 온 가족이 원탁에 빙 둘러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 엄마의 생일이라며 함께 술이나 한잔하려고 불렀다는 것이다. 늘 고마운 친구의 아내는 진득하고 입 무거운 사람답게 “어서 와!” 조용히 나를 맞는다. 각별한 배려로 친구와의 관계를 편하게 지켜 주는 장본인이다. 친구도 친구지만 그 친구의 아내 역시 허물없는 친구로 이렇게 가깝게 지낸다.
묵을수록 깊은 맛을 내는 건 장독대의 간장만은 아닐 것이다. 지난 세월이 없었다면 만수된 광주호수처럼 넉넉한 노년의 우정을 맞을 수 있을까. 그 옛날 산책길에서 올려다보았던, 덜 채워진 달빛은 이제 나의 몫이 아닌가 싶다.
나는 이렇게 산다.
<오희숙 약력>
▶‘문예사조’ 수필, ‘한국아동문학연구회’ 동시 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아동문학연구회, 광주문인협회, 광주수필 회원
▶동시 수필 묶음집 ‘연정涓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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