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광주 고려인마을에는 큰 변화가 찾아왔다. 외국인 집성촌에 그쳤던 고려인마을은 ‘난민 876명 무사 입국’이란 기적을 만들어 낸 인류애 실현 현장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마을의 위상 상승과 반대로 구성원들의 삶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단순 노무를 제외하곤 마땅한 일자리가 없는데, 이마저도 넉넉지 않아 마을을 떠나가는 이들도 상당하다는 후문이다. 무엇보다 체류를 위한 비자를 발급받지 못할 경우 조상의 땅에서 추방되거나 ‘불법 체류자’로 살아가야 한다.

이에 취재진(광주매일신문·광남일보)은 타 집성촌과 강제 이주 현장 등 고려인들이 먼저 뿌리내린 곳을 찾아 이들이 무엇을 남겼고, 어떻게 사회 구성원으로 거듭났는지 살펴봤다. 이를 통해 고려인 후손들의 정착 과제는 무엇인지 제언해 본다. /편집자 주


◇‘세계고려인단체’ 한 축…구성원 미래 ‘암울’

“마을은 커졌지만, 먹거리는 부족하고 체류 문제까지…완전한 정착은 아직 멀었죠.”

신조야(68) 광주 고려인마을 대표는 마을의 현 상황이 낙관적이지 않다고 평가한다.

1990년대 초반 조국을 찾은 고려인들이 터를 잡은 광산구 월곡동에 2005년 2월 고려인 30여가정이 정착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고려인마을’의 주민 수는 2011년 1월 300여명, 2012년 12월 1천200여명, 2014년 3월 2천여명으로 불어났다.

주민 수는 계속 늘어나 2022년 12월 법무부가 발표한 출입국 자료 ‘고려인 500명 이상 거주 도시’에 따르면 광주 광산구 내 고려인은 4천753명으로 파악됐으며 고려인마을에선 마을 거주 고려인이 올해 7천명을 넘어선 것으로 보고 있다.

거주민의 증가는 고려인 공동체의 변화로 이어졌다. 2004년 9월 신조야씨가 대표로 추대, 구성된 고려인공동체는 2013년 고려인마을협동조합으로 변모했고 2014년에는 현재의 (사)고려인마을이 태동했다.

특히 지난 2021년 ‘월곡고려인문화관 결’이 개관하면서 ‘역사마을 1번지’로 거듭난 고려인마을은 ‘관광객 천만시대’를 위해 지역사회와 함께 다양한 행사를 추진해 오고 있다.

그러다 지난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고려인마을은 뜻하지 않게 전환기를 맞이했다.

우크라이나 출신 주민들로부터 동포들의 비보를 들은 고려인마을은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자 지난해 3월 모금운동을 전개하며 ‘항공권 지원’을 시작했다. 올해 7월까지 고려인마을의 도움으로 대한민국에 입국한 전쟁난민은 876명에 달한다.

고려인마을의 이같은 인도주의적 활동과 함께 올해 5월 고려인마을을 주축으로 세계고려인단체총연합회가 결성되면서 마을은 국내의 관심과 해외의 이목을 끄는 등 위상이 급부상했다.

그러나 선조들의 땅에서 ‘한국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고려인 후손들의 현실은 어둡다.

신 대표는 “고려인마을 거주 동포 중 영주권자는 극히 일부”라며 “대부분 재외동포비자(F-4)나 방문취업비자(H-2)를 받은 외국 국적자로 1-3년에 한 번씩 비자를 연장해야 한국에서 살 수 있다”고 속사정을 털어놨다.

이어 신 대표는 “국적이 없어 대부분의 고려인이 단순 노동에 종사하는데 그마저도 넉넉지 않아 고려인마을을 떠나는 이들도 상당하다”며 “지역사회의 후원 없이 살아가기 힘든 고려인 후손들이 완전히 정착할 수 있도록 대책이 시급하다”고 토로했다.


◇‘고려인 최다’ 안산 단원구 속 땟골마을

경기도 안산 땟골마을 거리는 러시아어로 된 간판과 고려인 식당이 곳곳에 자리를 잡아 광주 고려인마을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신 대표의 고충을 들은 뒤 지난 8월18일 찾은 또다른 고려인 집성촌 ‘땟골마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에 위치한 이곳 마을의 분위기는 광주 고려인마을과 비슷했다.

지곡로를 따라 늘어선 상가들의 간판에선 러시아어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고, 고려인 현지 식당도 눈에 띄었다. 특히 대부분의 마트에서 러시아·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에서 만든 식료품이 즐비해 이곳에 상당수의 고려인이 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지난해 12월 법무부 발표 자료 기준 단원구 거주 고려인은 국내 최대(1만2천637명)로 집계됐고 땟골마을의 고려인 주민도 3천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지만, 고려인마을과 달리 거리에서 고려인들을 찾아보긴 힘들었다.

국내 고려인 최다 거주지역인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는 3천여명의 고려인이 모여 사는 땟골마을이 있다. 사진은 땟골마을 안내 표지판.

이에 대해 김영숙 안산시 고려인문화센터 센터장은 “대부분의 고려인들이 인근 반월·시화산단에서 일하다 보니 저녁이 돼야 거리가 활기를 띤다”고 귀띔하며 고려인 집성촌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양 산단을 꼽았다.

외국인도 일정 수준의 소득을 올릴 수 있다 보니 먹거리를 찾아온 고려인들이 몰려들었고 자연스레 집단 거주지가 형성됐다는 것.

또 안산시가 외국인 주민을 위한 외국인지원본부(2과 6팀)를 두고 체계적인 지원책을 펴 인프라가 잘 갖춰진 점도 고려인 증가에 기여했다는 게 김 센터장의 설명이다.

고려인들의 어려움에 십분 공감하고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선 (사)너머를 비롯한 시민단체의 공로도 크다.

특히 국내거주 고려인 동포의 안정적 체류를 위해 설립된 (사)너머는 2016년부터 ‘고려인문화센터’를 위탁 운영하며 어린 고려인 자녀부터 성인까지 맞춤형 지원을 펼치면서 완전한 정착을 돕고 있다.

땟골마을 내 고려인문화센터는 어린 고려인 자녀부터 성인까지 맞춤형 지원을 펼치며 정착을 돕고 있다. 사진은 김영숙 안산시 고려인문화센터장.

그 덕에 내국인 감소로 쇠락하던 마을은 날이 갈수록 번영하고 있다. 2014년 문을 닫기 직전이었던 인근 선일초등학교가 고려인 학생들이 다니기 시작하면서 2017년 국제혁신학교로 지정된 게 대표적인 예다.

이 밖에도 땟골마을은 고려인이 고향의 풍습을 잊지 않고 전승할 수 있도록 명절 ‘한식’을 내국인과 함께 쇠고 있다. 이러한 선주민과 이주민 간 화합 활동 덕에 땟골마을은 모범적 ‘다문화 도시’로 손꼽힌다.

때문에 땟골마을 구성원들은 이곳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계속 살아가길 희망한다.

두 아이와 함께 땟골마을에 거주하는 고려인 3세 김 비탈리씨는 “카자흐스탄을 떠나 한국에 처음 왔을 땐 ‘조상의 땅’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면서도 “의식주가 해결되고 자식들도 이곳에서 살 수 있도록 여러 곳에서 다방면으로 도와주다 보니 땟골마을은 이젠 떠나기 싫은 고향이 됐다”고 말했다.

김 센터장은 “이주 고려인 대부분 먹고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난 이들인 만큼 가장 중요한 건 생계가 보장되는 일자리”라며 “단기적인 물질적 지원은 ‘이주민 정착’ 과제의 해법이 되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김 센터장은 “행정 기관 역시 외국인 집성촌이 있는 동 행정복지센터에 상시 통역인을 배치하거나 외국어 안내물을 비치하는 등 이주민의 눈높이에 맞춘 정책을 펼쳐야 한다”며 “이러한 것들이 합쳐져 새 삶을 시작해 볼 만 하겠다는 ‘희망’이 이주민들의 마음에 들어서야 진정한 정착이 가능할 거라 본다”고 제언했다.

/안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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