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기 전남도립대 교양학부·문학평론가

혹독한 겨울이 다가오는 모양이다. 도로를 지나다 보면 가로수 가지치기 작업이 한창이다. 근 1년 정도 무탈하게 자랐을 나무들의 가지를 섬��할 정도로 인정사정없이 쳐내고 있다. 풍성하게 뻗은 가지와 나뭇잎들이 본래 가발이었던 듯, 흉물스럽게 벗겨진 나뭇가지는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고 있다.

만약 나무가 사람처럼 인지능력이 있거나 말할 수 있다면, 타에 의해 자신의 팔과 다리가 저렇게 무참히 난도질당하는 상황에서 과연 어떤 행동을 취할까. 글쎄, 이 상황을 가만히 보고 있는 게 더 이상할 터이다.

요즘 정치권도 ‘가지치기 시즌’이 돌아온 것 같다. 여당이나 야당 가릴 것 없이 조만간 냉혹한 한파가 불어닥칠 것이란 예감이 든다. 이른바 ‘혁신’이라는 거대한 이름을 내걸고 내년 총선 공천을 위한 가지치기 작업을 준비하고 있어서다.

혁신(革新)을 다르게 개혁(改革)으로 바꿔 써도 그 뜻은 같다. 혁신과 개혁을 곧이곧대로 직역하면 ‘기존의 생가죽을 벗겨내고 새 가죽으로 간다’라는 아주 무시무시하고 엄청난 말이다. 혁신과 개혁이 언제나 히든카드로 쓰이는 이유다.

혁신과 개혁은 긍정적인 어휘로 받아들여지는 단어다. 하지만 좋게 바꾼다는 뜻의 ‘개선(改善)’이나 ‘변화(變化)’와 달리 ‘모든 걸 새롭게 뜯어고친다’라는 다소 위협적인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사실, ‘개혁’은 한국사나 세계사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권을 손에 넣은 권력자는 너 나 할 것 없이 개혁을 소리 높여 외친다. 과거의 낡은 제도나 전임자의 인적 청산, 조직 기구 따위를 새롭게 바꿔서 본인의 입맛대로 통치하겠단 뜻이다. 그 사례를 보건대, 역사 이래 개혁이 성공한 적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대개 개혁은 실패하고, 정치적 수사로 포장한 의의만 남는 것이다. 오죽하면 개혁이 혁명보다 더 어렵다는 말까지 있겠는가.

특히 정치 개혁은 대부분 재미를 보지 못하고, 화폐나 군제 같은 개혁은 나름대로 성과를 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개혁 주체가 민중이 아닌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기 때문이다. 기득권 세력의 이득을 직접적으로 침해하지 않거나, 침해하더라도 정도가 낮은 개혁들은 어느 정도 성과가 있다. 어떠한 권력자라도 권력은 곧 기득권 세력의 지지에서 나온다. 정치 개혁이 번번이 실패하는 까닭은 그 권력을 떠받치는 기득권 세력과의 밀착 관계가 빈약한 탓이 원인이다.

그렇다고 개혁이라는 게 무조건 좋은 쪽으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방향성이 잘못되었을 경우,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봤다.

진정한 개혁은 국민이나 지역 공동체가 지배계층에 대항해서 자발적으로 이루어내는 것이다. 위로부터의 개혁은 개혁이라고 볼 수 없다. 그건 국민의 매서운 눈초리에 떼밀려 ‘개선이나 변화’ 정도를 보여주는, 일종의 요식행위 일 따름이다.

요즘, 이건희 회장이 생전에 남겼던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 모두 바꿔라”라는 어록이 정치권에서 회자하고 있다. 정말 의미심장한 말이다. 그런데 정치권에서 헐값으로 그냥 갖다 쓸 말은 아닌 듯싶다. 여기서 ‘마누라와 자식’은 곧 본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엊그제 도하 모든 신문의 만평에서 보여준 키워드는 “나만 빼고”였다. 인상적인 단어다. 오늘의 정치 현실을 이렇게 한 단어로 명징하게 정리할 수 있을까 싶다.

얼마 후, 정치권이 가지치기 작업에 들어갈 것이다. 오랜만에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당사자들이야 속이 타들어 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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