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K 작가는 음식을 소재로 현대사회의 단면을 맛깔스럽게 담아내는 ‘음식산수’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사진은 작품 ‘다향만리(茶香萬里)’ 앞에 선 작가(사진 上)와 ‘진주를 찾아라’ 작품을 작업 중인 모습(사진 下).

지역에서 작가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를 지닐까. 광주에는 창작의 열정을 불태우며 누구보다 자신의 작업에 애정을 갖고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쳐나가는 젊은 작가들이 있다. 이들의 행보는 광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현대미술의 흐름 속 국내외 여러 활동을 통해 동시대 화두를 던지며 지역 미술의 미래를 이끌어가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다양한 매체와 개념으로 작품세계를 일궈나가는 지역 청·장년 작가들의 목소리를 통해 총 10회에 걸쳐 광주 미술계의 현주소와 과제를 짚어본다. /편집자주

광주비엔날레가 올해 창설 30주년을 맞았다. 광주 정신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만들고자 세워진 광주비엔날레는 지역 내 많은 작가들이 미술에 대한 희망을 키워갈 수 있게 했다.

격변의 시대인 1980년 광주에서 태어난 하루.K(본명 김형진) 또한 매회 광주비엔날레를 접하며 작가에 대한 꿈을 길러 나갔다.

다양한 시도를 통해 동양화 계승과 발전을 거듭해오고 있는 하루.K 작가. 2024년을 이틀 앞둔 지난해 12월30일 광주 봉선동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음식을 소재로 현대사회의 단면을 맛깔스레 담아낸 그의 ‘음식산수’ 작업은 이미 전국은 물론 해외에서까지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벨기에 등 유럽 미술시장에도 진출해 갤러리들과 전시 및 아트페어 협업을 진행 중이다.

기존의 산수화가 속세를 떠나 자연에 머물며 도를 즐기는 선비의 이상향을 담았다면, 그의 ‘맛있는’ 산수는 물질과 정신의 균형된 삶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이상향을 나타낸다.

“어떻게 하면 동양화가 대중의 관심을 이끌 수 있을지 항상 고민했어요. 우리는 지금 서구적인 삶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고, 정신은 아직 유교 문화에 더 가깝잖아요. 그렇다면 이게 동양화가 처한 현실은 아닐까 생각하게 됐죠.”

그렇게 시작된 그의 작업은 한 화면 속 동서양 문화가 섞인 실험작을 거쳐 이내 음식과 함께 하는 ‘맛있는’ 산수화로 확장됐다.

작가의 꿈을 꾸며 서울에 올라가 홍익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IMF 시기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며 학원강사로 생업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내 작업을 하기보다는 남을 가르치는 시간이 많았어요. 작가가 되기 위해 서울에 온 건데, 이럴 거면 광주로 돌아가야겠단 생각이었죠. 서울에서 삶의 속도 또한 저와 맞지 않았습니다. 남들에게 인정받아야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 같았어요. 나만의 속도로 느리지만 차근차근 내 자신을 성장시키자 마음 먹고 광주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이어가게 됐습니다.”

‘하루하루’의 태도가 결국 한 사람의 일생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인 그의 필명도 이러한 가치관과 꼭 닮아있다.

무엇보다 그가 작품세계를 굳건히 다질 수 있었던 계기는 광주에서의 ‘레지던시’ 활동이었다.

레지던시란 예술가들이 일정 공간에 거주하며 창작활동을 펼치는 시스템으로, 활동 결과물 공유를 넘어 다른 아티스트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작업세계를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2010-2011년 의재문화재단 창작스튜디오를 시작으로 광주시립미술관의 양산동 창작스튜디오와 북경창작센터 입주작가로서의 작업은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원동력이다.

“당시 지역 미술관의 레지던시는 청년 작가들에게 단비와 같았어요. 갈피를 잡지 못한 때 방향을 제시해주기도 하고 보다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활로를 열어줬습니다.”

청년 예술인들에게 실질적인 창작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지만 최근 지역 내에서 관련 사업은 점점 축소해가는 모양새다.

“레지던시 기능이 약화되고 있어 굉장히 아쉬워요. 지역 미술기관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청년 작가를 양성하는 일입니다. 창작공간의 기본적인 특성은 작가에 대한 애정이거든요. 그렇기에 선정된 작가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현재 광주의 레지던시 사업은 본래의 기능을 잃어가고 있어요. 예술가들이 보다 깊이 있는 작업을 펼쳐나갈 수 있도록 본연의 역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작가는 그럼에도 광주의 문화 인프라가 다른 지역에 비해 잘 갖춰져 있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평가했다.

“시립미술관과 비엔날레,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등 문화예술 관련 유관기관들이 존재하고, 그곳에서 다양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 게 큰 혜택입니다. 신세계와 롯데 등 기업 갤러리에서의 작가 발굴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고, 문화재단에서 지원하는 대안 공간들도 각자의 역할을 잘 해내고 있어요. 다만 대안 공간에서 출발한 작가들이 다음 단계로 성장할 수 있는 어떤 지점을 구축하는 건 새로운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함께 그는 지역 내 상업 아트씬에서의 활동이 턱없이 부족해 젊은 작가들이 작품의 판로를 개척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언급하며 상업 갤러리 활성화 노력도 잇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그는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서의 전시 이후 동남아 현대미술의 부상에 주목하고 있다.

“족자카르타는 대도시는 아니지만, 인도네시아 아트씬에서 유망한 작가들이 밀집해있는 현대미술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제 비엔날레 초청작가들이 모여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고, 선후배 작가들 간 교류가 잘 돼 있어 국제 무대로의 진출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요. 신진작가의 전시작들을 성장시켜 수도인 자카르타나 세계 무대에 내보이는 방식인 거죠. 여기에 다양한 커리큘럼이 구성돼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해요. 지방이 취할 수 있는 전략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곳 대안 전시공간은 척박한 상황에서도 협력을 통해 활기가 넘치는 예술활동을 이어가고 있어요.”

특히 작가는 이번 방문을 통해 인도네시아 유력 갤러리 중 하나인 스리사산티 갤러리의 제안으로 내년 전시를 열고, 앞으로도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나갈 예정이다.

그가 요즘 주력하고 있는 작업은 ‘레인보우’ 시리즈다. 알록달록 무지개 색깔의 사탕이나 초콜릿, 탕후루 등 톡톡 튀는 느낌을 주는 음식들이 그림 속에서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는 혼밥문화를 상징하는 ‘도시락’ 시리즈와 혼자만의 시간, 명상을 중시하는 ‘차(茶)’ 시리즈 작업을 중점적으로 펼쳐냈다. 작업 당시의 상황과 자신의 경험을 주요 소재로 삼은 것이다.

“레인보우 시리즈 또한 이전 작품들과 같이 우리의 이상향과 맥을 함께 합니다. 지금 사회의 욕망은 조금 더 화려하고 달콤한 쪽으로 흘러간다는 생각을 했어요. 힘들고 어려운 시기일수록 밝은 분위기의 그림으로 관람객들이 즐거움을 얻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맛있는산수(레인보우케이크)’

같은 길을 걷는 후배 작가들에게 그는 꾸준한 작업만이 자신만의 고유한 예술관을 형성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그림 기교를 연마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끈기있는 작품활동이라고 생각해요. 꾸준히 하다보면 그게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 꼭 발현되거든요. 빨리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서 쉽게 포기하거나 성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열심히 하되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기객관화 또한 충분히 이뤄져야 해요. 내 작품을 잘 파악한 뒤 단점을 최대한 제거하고 장점은 극대화시키려는 노력이 매번 반복돼야 합니다. 이는 지금의 저에게도 끊임없이 되뇌는 부분이에요.”

그는 마지막으로 한 명의 작가로서 지역 문화기관에 당부하고 싶은 말을 덧붙였다.

“사적인 이익만을 좇아 지역 미술정책이 길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광주 문화기관들이 건강한 미술 생태계를 만들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조금 더 고민해봤으면 좋겠어요. 한 사람의 독단적인 결정보다는 그 분야 전문가 여러 명이 머리를 맞댔을 때의 시너지가 더 크다는 걸 간과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공청회나 집담회 등 의견 수렴의 장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기관, 예술가 그리고 시민들 간 충분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서만 지역 문화계의 성장과 발전을 이뤄갈 수 있습니다.”

/글·사진=최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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