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남구 봉선동 한 카페에서 만난 박인선 작가. 이날 인터뷰는 지난 날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작가의 예전 집터에서 진행됐다.

‘공간’이 주는 의미는 저마다 특별하다. 개개인이 지닌 ‘공간’에 대한 기억은 시각적으로 경험한 강렬한 인상, 피부로 와닿는 촉각이나 특유의 냄새 등으로 머릿속에 각인된다.

오래된 기억 속 ‘공간’의 다양한 면모를 담아내는 작업을 진행 중인 박인선 작가를 지난 16일 남구 봉선동 카페 부띠크그레이어에서 만났다.

이번 인터뷰는 작가에게 유독 의미있는 공간에서 진행됐다. 건물 4층에 자리한 카페는 아늑한 실내와 돔 형태의 독특한 구조물이 돋보이는 야외공간으로 조성됐다. 주변 다른 건물들보다 높은 덕에 옹기종기 붙어있는 주택과 골목골목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사실 이 자리는 작가가 어린 시절부터 지낸 집터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곳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찾아오면서 집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건물이 세워졌다.

인터뷰 전날에서야 이곳 카페의 존재를 알게 된 작가는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이 공간으로 황급히 만남의 장소를 바꿨다는 후문을 전했다.


“카페가 생긴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아버지를 생각했을 때 막상 떠오르는 장소가 너무 없는 거예요. 살던 집이 사라지니 아빠가 사용하셨던 물건이나 그 체취가 남은 것들을 이제는 어디서 찾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곳을 발견하니 많은 생각이 교차했죠. 오늘 인터뷰와도 너무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 이곳으로 기자님을 초대하게 됐어요.”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을 즐겨하던 아버지 덕분에 당시 집은 마치 작은 숲 속 정원 같았다고 작가는 회상했다.

“집이 허물어진 다음에야 이곳 공간을 남겨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금 늦었지만 집터 주변의 풍경을 촬영하고, 인터넷 로드뷰를 통해 하나하나 자재를 지어 만들듯이 아버지와 함께한 집을 완성했습니다.”

오랜 시간 머문 작가의 집이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여기에는 촬영한 사진을 아카이빙하고 작가가 그 장소에서 느낀 특유의 분위기를 담은 페인팅 작업이 가미됐다.

오랜 시간 머문 작가의 집을 표현한 작품 ‘연’(緣). 사진 아카이빙에 상상을 더한 페인팅 작업이 가미됐다.

“제 작품은 사진이 갖는 사실성을 바탕으로 상상력이 더해져 만들어진 거라 보면 돼요. 저는 재료에 대해서 따로 가이드라인을 주지는 않거든요. 사진이든, 회화든 캔버스에 사용되는 하나의 물감이라고 생각해요.”


초창기 그의 작업은 건물에 대한 기록적 형태로 이뤄졌다. 동네에 있는 기존 건물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작가가 체화한 대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오래된 건물일 수록 그 역사도 깊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건물마다 하나의 상(像)이 있고 거기에 사는 사람의 기운이 담겨있을 것 같았죠. 흘러간 시간, 수많은 이야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건물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공간에 대한 이러한 작업은 2006년 백운동 까치고개 일대 작가의 외할머니집이 철거될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1-2년 후 재개발로 사라질 상황에 처한 한옥을 작업장이자 전시장으로 활용한 것.


“수많은 기억이 축적된 공간이 한순간에 무너졌을 때 그 기억을 소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더 이상 피부로 이 집을 느끼지 못하겠다, 터만 남겠다는 생각에 자연스레 ‘죽음’이 연상됐어요. 떠나가는 집을 달래주고 싶어서 일종의 퍼포먼스를 진행했어요. 사람이 만든 인공적인 형태의 장소지만, 영혼이 깃들어 있을 것만 같았어요. 집에서 나온 여러 물건들과 잔해를 한데 모아 뒤뜰에서 태우고, 그 흔적들은 ‘메모리 팩(Memory Pack)’에 채워 넣어 나무에 걸었어요. 집은 사라지겠지만, 우리는 이 작업을 통해 기억하겠다는 의미에서였죠.”


여기서 착안된 ‘뿌리’ 연작은 2016광주비엔날레에 출품되기도 했다. 크레인 후크에 매달려 뿌리가 뽑힌 채 들어 올려진 주택이 캔버스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재개발 사업이 도시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면서도 원주민이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하는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상기시킨다.

재개발 사업이 도시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면서도 오랫동안 축적돼온 공간의 기억을 담아낸 작품 ‘뿌리’.

공간과 공간이 대립하며 거기서 파생되는 에너지에 관심이 많다는 작가는 현대사회 도심이 다소 기형적으로 변모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가장 완벽하면서도 본연적인 형태가 원이라고 생각했어요. 공간이 균형을 맞춰가야 할텐데 도시 풍경은 갈수록 이기적으로, 심각한 변형이 이뤄지는 것 같았어요. 건물과 도시에 인간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하면서 삶의 본질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해본 것 같아요.”


그래서일까. 실제 그의 작업에서는 대칭 그리고 균형을 이루는 형태의 회화들이 많다. 여기에 땅과 물, 바람, 나무 등 생명체에 관한 공간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지원한 제주도 레지던시도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줬다.


“자연을 거시적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나 돌아보게 됐어요. 거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생태환경 전문가들과 함께 이야기하면서 제주도 구석구석을 보게 된 거죠. 해양 환경오염이 심각하다는 걸 몸소 체험하면서 아름다움 그 이면에 감춰진 환경 오염에 대해 촬영하고 작업했던 기억이 나요.”


플라스틱, 스티로폼 쓰레기를 제주도 자연의 모습에 덧입힌 작품들은 상상 속 펼쳐지는 가상 공간 같으면서도 마치 우리 주변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익숙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와 함께 필리핀 바콜로드 레지던시에서 시도한 작업은 도시 변화의 속도에 관련된 것들로, 작품 매체나 주제를 확장하는 계기와 함께 작업에 대한 새로운 자극으로 작용했다.

자연 공간, 물성에 대한 고민을 했던 시기 작가는 ‘물’이라는 새로운 소재를 본격적으로 활용했다. 작업은 형태가 없고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물’이 삶과 죽음, 땅과 바다를 모두 아우른다는 데부터 시작됐다. 이는 ‘응집, 그리고 이완’을 비롯해 ‘물줄기’, ‘seed’ 시리즈로 발전을 거듭했다.

영상 작품 ‘Water forest’(왼쪽)와 ‘물줄기’ 연작.

지난해 광주시립미술관 레지던시에서 작가는 패턴화되는 광주의 건물과 도시 모습을 하나의 응집된 알갱이로 표현한 ‘픽셀’ 연작과 생명체들의 공명을 담아낸 영상 작업 ‘Water forest’ 등을 선보였다.

지난해 광주시립미술관 레지던시에서 작업 중인 작가의 모습.

새로운 실험과 작업의 방향을 끊임없이 모색해가고 있지만, 초반 작업인 ‘뿌리’ 시리즈를 비롯해 그 이후의 작업들에서 또한 작가가 말하는 것은 결국 ‘공간’에 대한 사유이자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많은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한 꾸준한 작업을 중시한다는 그는 지금까지의 작업을 점검하고 조금 더 밀도를 높여 작품활동을 이어나갈 예정이다.


“최근에 아이를 낳고 육아하는 데 집중해 있다가 갑자기 작품 이야기를 하려니 조금 막막하기도 했어요. 예전 작업하던 시기를 떠올리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됐고, 그 덕에 그간의 작업을 정리하는 귀중한 시간이 된 것 같아요. 무엇보다 소중한 추억이 서린 이 공간을 보다 많은 이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기도 해요. 우리가 머금고 있는 여러 공간에 대한 탐구를 앞으로도 다방면으로 완성해나가고 싶어요.”

/글·사진=최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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