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es of Winter’ 앞에 선 정승원 작가

그림은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했던 기억을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당시의 시간과 장소, 분위기를 화면 속 오롯이 담아낸 한 장의 회화는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한 편의 추억여행을 떠나게 한다.

지난달 25일 광주 북구 작업실에서 만난 정승원 작가의 작품 또한 그러한 추억을 자아낸다. 그림 속 주인공들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고 만다.

최근 롯데백화점 본점 에비뉴엘 아트월에서 선보인 그의 근작 ‘Memories of Winter’는 오밀조밀한 캐릭터들과 함께 톡톡 튀는 색감이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눈사람을 만들거나 썰매를 끄는 아이들, 겨울의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트리, 눈 쌓인 관람차의 모습은 따스한 겨울 감성을 품고 있다.

그 위로는 펑펑 내리는 눈을 입체감 있게 담아냈다.

그림 전체를 감싸고 있는 듯한 눈 한송이 한송이는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낸 판화 위 작가가 손수 페인팅해 완성했다. 최근 작업들은 이처럼 실크스크린과 페인팅 작업이 융합된 형태다.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티셔츠에 그림을 찍어내는 작업 중인 작가의 모습 작품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그가 처음 실크스크린 작업에 나선 건 2016년 독일 유학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과의 스톡홀름 여행 이후부터다.

즐거웠던 순간을 함께 기억하고 나누고 싶었던 작가는 학교에서 배운 실크스크린 기법을 어렴풋이 떠올려내며 첫 판화작품 ‘Stockholm’을 완성했다.

“독일에서 공부할 때 일러스트레이션이나 그래픽 디자인 수업에서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책, 포스터를 만들곤 했어요. 여행에 다녀와서 친구들과의 추억을 담은 그림을 선물해야겠단 생각이었죠. 원래는 태블릿으로 그린 그림을 인쇄해 주려 했는데, 이왕이면 저와 제 친구들이 같은 작품을 나눠 가질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았어요. 자연스럽게 판화를 떠올리게 됐죠.”

그렇게 완성된 추억 가득한 선물은 친구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실크스크린 작업은 학교에서와는 달리 시행착오가 따랐지만, 작가는 점차 판화의 매력과 재미를 느끼며 또다른 작업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제가 가본 곳 중 좋아하는 장소들을 판화에 담아보자는 생각으로 작업을 시작했어요. 지하철 역 아래 자리잡은 독일 전통 식당이나 단골 유기농 빵집, 옛날 맥주공장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린 레스토랑의 모습 등 현지 분위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들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2017년에는 이렇게 하나둘 그려낸 작품들로 독일 베를린 외곽의 작은 전시장에서 처음 개인전도 열었다. 일 년 동안 작업해온 20여 점 작품들로 전시를 마련한 것.

우중충한 독일 날씨 속에서도 밝은 그림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며 감사 인사를 전하는 관람객들의 감상평을 들으면서 작가는 본격적으로 판화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최근 그의 작업은 ‘판화’라는 매체를 넘어 다양한 변화와 실험으로 확장됐다. 7년째 안동에서 진행 중인 하회탈판화전을 비롯해 서울 인사동 통인화랑판화전, 울산국제판화전 등 다양한 그룹전에서 입체 및 설치 작품 등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작가는 작품 속 이미지를 활용, 모빌 작품을 선보이기도 하고 정지된 화면에 생기를 불어넣는 영상 작업을 제작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모색 중이다.

지난해 무안군오승우미술관에서는 가변설치 작품 ‘City of Bremen’을 소개했다. 나무 합판에 색을 입히고 그 위에 실크스크린을 찍어낸 입체 작품들은 더욱 생생한 브레멘 도시 풍경을 연출했다.

지난해 무안군오승우미술관에서 선보인 설치 작품 ‘City of Bremen’

정승원作 ‘Bremen’

“판화 작업만 줄곧 했다면 금방 지쳤을 거에요. 설치나 영상 등 장르를 확장하다보니 더 재미있게 작업하고 있는 것 같아요. 결과물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제가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가 나오면 만족하는 편이에요. 부족한 게 있으면 다음엔 또 발전할 테니까요. 이것저것 시도해보면서 예상치 못한 결과물을 얻기도 했습니다. 과정 하나하나 의미가 남달라요.”

그는 광주 예술의거리 활성화를 통해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홍보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으면 좋겠다는 소망도 밝혔다.

“광주에는 서울 못지 않게 작가들이 많은 편이에요. 이들의 작품을 인쇄물이나 굿즈로 제작해 판매하는 편집숍 거리가 있으면 좋겠어요. 원화 작품보다 부담이 적고 쉽게 관심 가질 수 있는 상품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요. 예술의거리가 예전에 비해 유동 인구가 많이 줄었잖아요. 이 일대를 특색있는 거리로 탈바꿈해 다시 활성화시키는 방안을 마련했으면 합니다. 여러 작가들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예술에 관심 있는 타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질 거라 생각합니다.”

그의 작품은 아트상품으로도 만나볼 수 있다. 첫째 아이의 성장 과정을 담아낸 달력부터 컵이나 파우치, 소주병 라벨, 스티커, 스카프 등 다양한 굿즈를 만든 그는 최근에는 문희영 예술공간집 관장과 함께 호랑이 카펫을 제작 중이다.

예술공간집은 지역 작가들의 작품활동과 판로 개척을 돕는 광주 지역 대표적인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작가 작품을 기반으로 한 예술상품 제작에 손길을 보태고 있다.

예술공간집과 함께 준비 중인 ‘카펫 굿즈’가 쇼룸에 전시돼 있다. 예술공간집은 지역 작가들의 활동과 판로 개척을 돕는 광주지역 복합문화예술공간이다.

인터뷰를 마친 후 작가는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티셔츠에 그림을 찍어내는 작업을 보여줬다.

비어있는 실크스크린 판에 감광액(感光液·빛에 닿으면 물에 씻기지 않는 액체)을 도포한 후 건조시키고, 그 위에 미리 준비한 도면을 올리고 감광 작업을 거친다. 그리고 감광된 실크스크린 판을 세척한 후 판을 고정한다. 그 아래 티셔츠를 놓고 잉크를 도포한 후 스퀴지(고무 롤러)로 골고루 밀어 찍는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티셔츠 위에 원하는 그림이 고스란히 묻어 나온다.

올해 작가는 지난 여름 휴가차 가족들과 놀러 간 바닷가, 집에서 아이와 함께 키우는 우파루파 등 물속 생물들의 모습을 담은 새로운 작품을 구상 중이다.

“올 여름에는 계절과 어울리는 시원한 작업들을 선보이게 될 것 같아요. 즐거운 기억 속 순간들을 그림에 투영시킬 거예요. 행복한 추억을 떠올리며 제 그림을 보셨으면 좋겠어요. 기본적으로 좋은 작업이 바탕이 돼야 상품에 대한 다양한 시도도 가능하거든요. 올해는 기존 작품을 기반으로 굿즈 제작에 관심을 가져보려 해요. 아직 미숙한 점이 많은 만큼 꾸준히 작업을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판화만이 주는 매력에 대해 언급하며 ‘판화가’의 길로 접어든 후배 작가들에게 스스로의 작품을 ‘다른 시선’에서 바라볼 것을 제안했다.

“판화라는 분야를 쉽게 시작하기는 어려워요. 하지만 좋아서 하는 일이라면 어려움은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작업을 함께 하면서 다양한 시각을 키워보는 것도 추천해요. 다방면에서 자기 작업 스타일을 찾아보는 게 중요한 일이기도 하고요.”

판화를 하는 이유에 대해 묻자 작가는 ‘너무 재밌기 때문’이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결과는 물론 그 과정이 주는 재미가 상당하다는 설명이다.

“준비를 하면 할수록 완벽한 결과물이 나오는데, 조금씩 달라지는 부분이 판화의 묘미예요. 최종 완성됐을 때 느껴지는 희열이 있거든요. 상상 속 완벽한 모습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이 주는 재미가 굉장해서 판화에 관심 있다면 꼭 한번 경험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최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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