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12(토)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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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 수 없이 빽빽하게 들어찬 집들이 캔버스를 가득 메운다. 그림 속 차곡차곡 쌓아 올려진 집들은 그려졌다기보다는 지어졌다는 표현이 더 어울려 보인다.
안식, 편안함, 휴식 등 포근한 느낌을 떠올리게 하는 ‘집’은 가장 일상적인 공간이자 우리에게 없어선 안 되는 필수적인 존재다.
지난 13일 광산구 신가동 작업실에서 만난 고차분 작가는 오랜 시간 ‘집’을 작품 소재로 활용하면서도 끊임없는 변주를 통해 집의 다양한 면모를 담아내고 있다.
그의 ‘집’ 작업은 대학시절 마주한 목포 유달동 풍경으로부터 비롯됐다. 골목골목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목포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녹슨 파란 대문, 낡은 지붕, 사방에 뻗쳐있는 계단 등 동네 곳곳의 풍경은 작가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동네에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있는 것 같았어요. 인생이 뭔지도 모를 대학생 때인데도 그곳에선 왠지 모를 엄청난 감정들이 느껴졌어요. 처음에는 평범한 일상을 지닌 집을 다루다가 점점 다양한 서사를 품어낸 집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목포대 미술학과 졸업 이후 가구를 만드는 공방을 운영하던 그는 나무판에 ‘집’을 그려넣는 작업 등을 이어가면서 작가로서의 꿈을 놓지 않았다.
결혼하고 남편을 따라 광주로 터를 옮기게 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돌입했다.
2016년에는 은암미술관 레지던시 작가로 선정돼 ‘계림 창작마당 청년작가전’에 참여했다. 개인전 경력이 없었지만 오로지 작품만으로 평가받는 블라인드 테스트였기에 이곳에서 마음껏 자신의 재능을 펼쳐낼 수 있었다.
“정말 좋은 기회였죠. 지금 떠올려보면 아무 생각 없이 작업에 몰두했던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그때 제가 해보고 싶었던 집 그림을 집중적으로 작업했던 것 같아요. 그 이후로 개인전도 열고 기관에서 작품도 구입해주시고 소중한 인연들도 맺게 됐어요.”
그가 작품활동에만 오롯이 매달릴 수 있었던 건 아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림을 잠시 쉬면서 사무직 일을 하기도 했고 2018년에는 딸아이를 출산한 후 육아와 함께 작업을 병행하며 밤낮없는 생활도 이어갔다.
광주에서 활동하며 만난 컬렉터 고 김용윤 씨는 그의 작품활동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광주극장의 유일무이한 평생회원이기도 했던 그는 지역에서 장르를 가리지 않는 문화예술 향유자였다. 2019년 드영미술관 그룹전에서의 인연을 시작으로 김 씨는 작가 고차분의 제1호 팬이 됐다.
“제 실력이 좋아서라기보다는 그 분이 아무런 조건 없이 제 작품을 좋아해주신 것 같아요. 당시만 해도 저평가받던 제 그림을 응원해주시고 관련 글도 지속적으로 적어주셨어요. 제 작품 활동이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는 큰 도움이 됐습니다.”
2020년 전남문화재단이 국내 최대 경매회사인 서울옥션과 공동기획한 ‘제로베이스 in 전남’ 프로젝트는 작가가 미술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줬다.
중앙에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 작가들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장으로, 이들의 작품을 시작가 0원부터 경매해 구매자들이 전적으로 작품 값어치를 결정하는 방식이다.
작가의 작품은 현재 컬렉터들의 관심을 받으며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집’이 주는 특유의 편안함 그리고 정겨움은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까지도 그 영향을 뻗친다.
“지역 안에서만 국한되지 않으려 해요. 현재 광주·전남 지역 작가들이 중앙 화단에 자신을 알릴 수 있는 통로는 거의 없어요. 지역에서는 나인갤러리 이외로 수도권과 적극적으로 교류, 매칭시켜줄 영향력 있는 화랑이 전무한 상태예요. 그런 부분이 아쉽죠. 작가 개인적인 노력도 필요해요. 제 경우엔 몇 년 사이 파리나 LA 등 해외 미술시장 진출을 위해 여러 방면에서 도전을 이어갔어요. 다른 지역, 다른 나라에 내 작품을 알려야겠단 생각으로요.”
그의 최근 작품들은 입체 작업이다. 물감을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완성된 수많은 집들은 굳으면서 날카로운 흔적을 남긴다. 마무리 작업은 가위나 칼로 뾰족한 부분을 도려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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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을 하면서 날카롭고 예민한 제 자신을 돌아보게 돼요. 모난 모습을 다듬으며 ‘부드러워져라, 둥글어져라’ 수없이 되뇌죠. 수양하는 마음으로 나 자신을 성찰하는 거예요. 캔버스 앞에 서 모난 데 없이 매끈하게 다듬어질 나의 내면을 바라면서요.”
오랫동안 기독교 신자로 지내왔기에 ‘신앙’은 그의 작업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다. 불완전한 ‘나’라는 존재를 넘어 모든 이들에게 진정한 안식처로서의 ‘집’을 꿈꾸는 작가는 화면을 빼곡히 채운 ‘집 무리들’을 그려 나간다.
“어려서부터 끊임없이 온전한 안식을 줄 누군가를 찾아왔던 것 같아요. 가족 등 주위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나 생각하게 됐죠.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찾아서,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쫓아다녔다고 해요. 그 사람들을 성경에서 ‘무리들’이라고 표현하더라고요. 여기서 착안해 작품 ‘길 위에 무리들’ 연작이 탄생하게 됐어요. 그림 속 집들은 제 마음을 대변하는 상징적 존재이기도 하고, 숱한 누군가이기도 해요. 길을 지나고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쉼 없이 나아가는 ‘집의 무리들’은 영원한 안식을 향해 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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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절실함’이야말로 작가가 작품 활동을 하는 데 가장 필요한 원동력이라고 언급했다.
“작업의 끈을 놓지 않으면 언젠가 준비된 사람에게 기회가 온다고 생각해요. 그에 앞서 전제돼야 하는 건 방대한 작업 결과물과 잘 정리된 포트폴리오죠. 훨씬 이전의 작업부터 현재까지 이어온 작품들을 연도별로 정리하는 게 중요한 이유입니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작업을 이어왔는지 확인시켜줄 수 있는 그런 자료들이요.”
작가의 열정적인 행보는 올해도 이어진다. 다음달 7일까지 열리는 서울 그룹전을 비롯해 4-5월 부산 아트페어 등 일정이 연이어 예정돼 있다.
“제 작업을 좋아해주신 많은 분들 덕분에 성장을 거듭해왔습니다. 지역이나 출신에 매몰되지 않고 작품 그대로를 바라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캔버스 안에 다양한 집과 재미 요소를 투영해낸다면 훨씬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완전한 안식으로 나아가는 ‘집’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보여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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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최명진 기자
글·사진=최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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