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민 전남대학교 대학원장

아헨시는 독일 서쪽, 벨기에와 네덜란드 접경에 있는 인구 26만 명 규모의 도시다. 전통적으로 제조업 중심의 산업 구조를 가진 도시였지만, 현재는 IT, 자동차·전기차, 스마트 팩토리, 로봇 공학 등이 주요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이곳에는 독일 대학의 혁신 모델로 손꼽히는 아헨공대(RWTH: Rheinisch-Westfalische Technische Hochschule)가 있다.

아헨공대는 1870년, 라인 지방 최초의 공업대학으로 설립됐다. 당시 산업화가 한창 진행 중이었고, 이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해 자연과학과 공학 중심의 9개 학과로 출발했다. 1960년대에는 인문학, 의학 등 전공을 확장하며 종합대학으로 발전했다.

현재 아헨공대에는 약 4만4천 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9천여 명의 교수·연구진과 직원이 근무한다. 2025년 QS 세계대학 순위에서 99위를 기록했으며, 독일 내에서는 5위를 차지했다. 서울대가 QS 순위 31위권인 점을 고려하면, 아헨공대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특히 기계공학 분야는 독일과 유럽을 선도하는 대학으로 평가받는다.

아헨공대의 이러한 명성은 아헨시와의 긴밀한 협력에서 비롯됐다. 아헨공대는 2007년 독일 정부가 9개 대학을 선정해 집중 육성하는 우수대학 지원사업에 선정됐다. 이 사업을 계기로 아헨공대는 아헨시와 공동으로 2020년까지의 미래전략을 수립해 추진했다.

아헨공대가 추진한 미래전략 중 대표적인 사업이 ‘RWTH 캠퍼스 프로젝트’다. 이 사업은 아헨공대가 95%, 아헨시가 5% 지분을 가진 공동 법인 형태로 운영했고, 유럽 대표 연구·산업 복합 단지를 조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약 250만㎡ 부지에 16개 분야별 대형 연구 클러스터와 수십 개의 혁신센터를 세워 첨단 기술 연구와 산업 간 협력을 촉진했다.

이 사업으로 현재 아헨공대 캠퍼스에는 바이오 의료 공학, 지속 가능 에너지, 광학, 생산 공학, 중장비 구동, 스마트 물류, 건설 등의 대형 클러스터가 형성됐다. 260여 개 연구소가 운영되고 있고, 유명한 프라운호퍼 연구소 3개가 이곳에 있다. 460여 개 기업이 입주해 있으며, 이들 기업은 대기업, 중소기업, 히든 챔피언급 중견기업, 스타트업 등으로 다양하다. 대표적으로 Siemens, BMW 그룹, SAP, Philips, Bosch 등이다.

아헨시는 도심 기차역 부지를 대학에 제공해 벤처·스타트업 중심의 창업 생태계도 조성했다. 아헨공대는 산학협력 전문기관을 캠퍼스에 두어 학생과 연구자의 아이디어 사업화와 상용화를 지원했다. 그 결과, 2024년 기준 누적 스타트업이 600개를 넘어서며 유럽의 대표 창업 도시가 됐다.

아헨공대와 함께 추진한 산업 생태계를 기반으로 아헨시는 독일 뿐 아니라, 유럽의 산업 혁신을 이끄는 도시로 성장했다. 특히 ‘유럽의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Industry 4.0을 견인하는 상징적인 도시가 됐다. 이제, 아헨공대의 학생과 연구 인력은 지역을 떠나지 않고, 관심 기업에 정착해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강력한 산업인프라 덕분에 아헨의 인구는 2011년부터 2024년까지 약 3만5천 명 증가했다. 인구 증가로 아헨시는 도시 경제 활성화, 교육 인프라 확충, 국제 인재 유입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다. 그만큼 도시의 활력과 지속 가능성이 커졌다.

아헨공대와 아헨시는 ‘대학과 도시가 협력하면 도시가 새로워질 수 있다’라는 점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인구 감소와 수도권 집중으로 어려움을 겪는 우리 중소도시와 대학이 참고할 만한 모델이다. 지방 소멸 위기에 직면한 도시들이 대학과 긴밀히 연계해 지역 특성에 맞는 발전 전략을 추진한다면, 지속 가능한 경제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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