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서 김인후 초상

-‘떡잎’부터 남달랐다
조선시대 관립 교육기관은 향교(鄕校)와 성균관(成均館)이다. 향교와 성균관에는 유학의 시조 공자를 모신 사당 문묘(文廟)가 있다. 문묘에는 공자와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유학자 18분도 함께 배향돼 있다. 이들을 ‘동방 18현’이라 부른다. 신라의 최치원, 고려의 정몽주, 조선의 조광조·이이·이황·송시열 등이 이들인데, 호남인으로 유일하게 배향된 인물이 하서 김인후다.

호남 유일의 문묘 배향자 김인후(金麟厚, 1510-1560)는 장성현 대맥동(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맥동)에서 참봉을 지낸 김령과 옥천조씨 사이에서 태어난다. 호는 하서(河西),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하서 김인후 묘소(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시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 이름이 널리 알려진다. 6살 때 “모양은 둥글어 지극히 크고 또 지극히 현묘한데, 넓고 빈 것이 땅의 주변을 둘렀도다. 덮혀있는 그 가운데 만물이 다 들어가는데, 기(杞) 나라 사람은 어찌하여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했던고”라는 ‘영천’(詠天)이란 제목의 시를 쓴다. 우주의 이치뿐만 아닌 ‘기우’(杞憂)의 고사마저 알고 있다.

고봉 기대승의 삼촌인 복재 기준은 9살이던 하서를 만나 “참으로 이 아이는 꽤와 재주가 많다. 장차 세자의 신하가 되겠다”고 예견한다. 10살 때 전라도 관찰사 김안국이 소학을 가르치고 “이는 나의 어린 벗”이라고 칭찬한다. 김인후는 떡잎부터 남달랐다.

1540년(중종 35) 문과에 급제한 후 받은 첫 관직이 승문원 부정자였다. 1543년(중종 38)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說書)가 되어 세자(인종)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직임을 맡는다.

그리고 그해, 기묘명현의 신원이 이뤄지지 않자, 부모 봉양을 핑계 삼아 옥과 현감으로 나간다. 1544년 중종이 승하하자, 이듬해인 1545년 제술관으로 한양에 올라온다. 세자 시절 인연을 맺은 인종이 즉위 몇 달 만에 승하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한 후 낙향한다. 명종은 몇 번이나 관직을 올려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인종에 대한 절의 때문이었다.

그는 장성에서 칩거하면서 성리학을 깊게 연구했으며 ‘소쇄원 48영’, ‘면앙정 30영’ 등 1천600여 수의 시를 짓는다. 그리고 변성온, 기효간, 조희문, 양자징 등 제자들을 길러낸다.

특히 그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당시 논란의 대상이었던 태극음양설에 대해, 그는 “이(理)와 기(氣)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지만, 도(道)와 기(器)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에 반대한다. 그의 이론은 후일 기대승의 주기설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1560년(명종 15), 낙향한 지 15년여 만에 세상을 뜬다. 51세였다. 정조는 하서를 문묘에 배향케 하고 영의정을 추증했으며, 시호 문정(文靖)을 (文正)으로 바꾼다.

- 인종을 그리워하다
김인후는 문과에 급제한 3년 뒤 세자, 즉 인종의 스승이 된다. 세자는 하서의 학문과 도덕의 훌륭함을 알고 정성스러운 마음과 공경하는 예로 대했고, 김인후 역시 세자의 덕이 뛰어나 후일 요·순 시대의 다스림을 기약할 수 있겠다 싶어 정성껏 이끈다. 둘은 서로 뜻이 맞음이 날로 두터웠다. 김인후가 입직한 날이면 세자가 몸소 나와 국정을 논의하다 이슥해서야 파하곤 했다.

세자의 하서 사랑은 대단했다. 그것을 보여준 사례가 ‘묵죽도’와 ‘주자대전’의 하사였다.

어느 날, 세자는 손수 그린 대나무 그림을 하사하고, 화축(畵軸)에 시를 쓰도록 한다. 하서는 묵죽에 다음의 시를 쓴다. “뿌리 가지 잎새 마디 모두 다 정미(精微)롭고, 굳은 돌은 벗인 양 범위 안에 들어 있네. 성스러운 우리 임금 조화를 짝지으사, 천지랑 함께 뭉쳐 어김이 없으시네.”

그리고 배 3개를 내린다. 한 개를 맛보고 나머지 2개를 보물처럼 간직했다가 부모님께 드리고, 씨를 집 앞에 심는다.

이 배나무가 임금이 내린 배라는 뜻의 ‘어사리’(御賜梨)다. 이 배나무는 20m가 넘게 커 지금도 열매를 맺는다. 인종의 김인후에 대한 신뢰와 배려, 우러나는 김인후의 충성심은 이후 군신 간의 모범 사례가 돼 인구에 회자됐다.

김인후가 세자와 인연을 맺은 1년 뒤인 1544년, 세자가 왕위에 오른다. 그런데 인종은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한다. 나이 서른이었다. 야사에는 문정왕후가 준 떡을 먹고 죽었다고 적혀 있다. 명종의 모친 문정왕후가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독살했다는 독살설이 나온 배경이다.

김인후는 인종을 그리워하는 사모곡 ‘유소사’(有所事)를 쓴다.

“임의 나이 서른을 바라볼 때, 내 나이 서른하고 여섯이었소. 신혼의 단꿈을 반도 다 못 누렸는데, 시위 떠난 화살처럼 떠나간 님아. 내 마음 돌이라서 구르지 않네. 세상사 흐르는 물처럼 잊혀지련만, 한창 때 해로할 임 여의고 나니, 눈 어둡고 이 빠지고 머리가 희었소. 슬픔 속에 사니 봄가을 몇 번이던가, 아직도 죽지 못해 살아 있다오.……”

명종이 즉위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김인후는 세상과 인연을 끊는다. 명종은 전라도사, 홍문관 교리, 성균관 직강에 임명해 불렀지만, 끝내 사양한다.

그는 죽기 직전 “내가 죽으면 을사년 이후의 관직일랑 쓰지 말라”고 유언까지 남긴다. 을사년 이후의 관직이란 명종이 내린 관직을 말한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백이숙제(伯夷叔齊)가 바로 하서 김인후였다.

인종에 대한 하서의 그리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인종의 기일인 음력 7월 초 하루가 되면 집 앞 난산(卵山)에 올라 종일 통곡했다. 지금 난산 정상에 통곡단이 건립돼 있고, 통곡단 입구에는 이 사실을 기록한 난산비가 서 있다.

제자인 송강 정철이 그 모습을 시로 남겼는데, 편액이 필암서원 청절당에 걸려있다. “동방에는 출처(出處, 사람의 처세) 바른 이 없는데 유독 담재옹(김인후의 별호) 한 분일레”라며 칭찬한다.

하서는 도학과 문장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끝까지 절의를 지킨 인물로 후대인들에게 추앙받고 있다. 이는 정조가 1796년 문묘에 배향하면서 내린 교지의 다음 글만으로도 충분하다.

“조선 개국 이래 도학(道學) 절의(節義) 문장(文章) 어느 하나도 빠뜨리지 않은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다. 하서는 해동의 염계요, 호남의 공자다.”

염계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다. 정조는 하서 김인후를 우리나라의 주자요, 호남의 공자라고 말할 정도였다.

- 필암서원, 세계문화유산이 되다
필암서원은 하서 김인후를 기리기 위해 장성 황룡면 필암리에 건립된 서원이다. 1975년 사적 제242호로 지정되고,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다. 서원 입구에 서 있는 세계문화유산 표지판은, 오늘 필암서원의 위상을 보여준다.

필암서원 세계문화유산 표지석

필암서원은 김인후 사후 30년 뒤인 1590년 그의 제자였던 변성온·기효간 등 호남 선비들이 장성읍 기산리에 창건한다. 정유재란으로 불에 탄 후 1624년 기산리 서쪽 증산동(甑山洞)에 다시 세워지고, 1662년(현종 3) 필암서원으로 사액된다. 1672년(현종 13) 지금의 자리인 해타리(海打里)로 옮겨오면서 마을 이름도 필암리로 바뀐다.

홍살문을 지나면 휴식 공간 확연루(廓然樓)가 나온다.

필암사원 입구 문 확연루

확연은 “하서 선생의 마음이 맑고 깨끗하며, 확연히 크며 공평무사하다”는 의미의 ‘확연대공’(廓然大公)에서 취한 말이다. 크고 호방한 편액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확연루를 지나면 유생들이 공부하던 강당 청절당(淸節堂)과 만난다.

편액 청절당은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인데, 송시열이 쓴 김인후의 신도비문에 나오는 ‘청풍대절’(淸風大節)에서 인용한 것이다. 청풍은 ‘부드럽고 맑게 부른 바람’이라는 뜻이고, 대절은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쳐 지키는 절개’라는 뜻으로 하서의 굳센 절의를 잘 표현하고 있다.

청절당 앞에는 인종이 세자 시절 손수 그려준 묵죽도의 판각을 보관하고 있는 경장각이 있는데, 주위 건물과는 품격이 다르다. 일반 서원과 어울리지 않게 3마리의 용머리와 국화문양이 조각된 주심포집 3칸의 팔작지붕 집이기 때문이다.

필암서원 내 장경각

경장각 건물에 용과 국화문양이 조각될 수 있었던 것은 인종의 유품인 묵죽과 관련이 있다. 멋드러진 경장각 편액의 글씨는 정조대왕의 친필이다.

경장각을 지나 내삼문을 들어가면 김인후와 제자이자 사위인 양자징의 신위를 모신 사당 우동사(祐東祀)가 있다.

우동의 의미도 신도비문에 나오는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 하서 김인후 선생을 태어나게 하였다”에서 동방의 ‘동’자와 돕다의 ‘우’자를 취한 것이다. 편액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송나라 주희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편액 하나하나의 뜻이 정말 깊다.

필암서원과 멀지 않은 맥호리 맥동 마을에는 김인후가 태어난 백화정이 있고, 백화정 입구에는 문정공하서김선생유허비도 서 있다. 이미 언급한 ‘어사리’도 집 옆에 있다.

마을을 조금 벗어나면 오른쪽에 그의 삶을 정리한 신도비가 있고, 무덤이 난산을 바라보며 안장되어 있다. 그런데 신도비가 두 개다. 비각 안에 있는 신도비는 1742년(영조 18)에 세웠는데,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10년 걸려 쓴 글이라고 한다. 그런데 1982년 건립된 신도비가 또 있다. 다시 세웠던 것은, 처음 세워진 신도비에 문묘 배향 및 영의정 증직, 시호 문정(文正, 처음 시호는 文靖)의 한자 변경 등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의정에 증직되고 문묘에 배향된 이야기가 빠져서는 안 된다.

마을 앞 난산에는 인종의 기일만 되면 통곡했던 장소에 통곡단과 그 사실을 기록한 난산비가 서 있다. 난산비와 통곡단에는 인종을 그리워하는 하서의 마음이 애절하게 묻어 있다.

광주에는 하서 김인후를 기리는 ‘하서로’가 있고, 인근 중외공원에는 동상도 건립돼 있다.

하서 김인후 동상(광주 중외공원)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오늘 장성은 하서 김인후, 노사 기정진 등으로 인해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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