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천’을 호로 삼다
풍영정의 주인공 칠계 김언거(金彦琚, 1503-1584)는 1503년(연산군 9) 광주목 마지면 선창리(광산구 신창동)에서 증사헌부 집의 김정의 셋째아들로 태어난다. 자는 계진(季珍), 호는 칠계(漆溪), 본관은 광산이다. 그의 호 칠계는 풍영정 앞 극락강이 ‘칠천’이라 불렸는데, 그 칠천에서 따온 것이다.

풍영정 전경.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자질이 있었던 김언거가 1531년(중종 26) 문과에 급제하여 받은 첫 관직은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 부정자였다. 이어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 홍문관 교리, 승문원 판교(判校), 연안부사 등을 지낸다. 사헌부 장령은 정4품의 벼슬이었고, 승문원 판교는 정3품 벼슬이었다. 관리들에 대한 감찰과 국왕의 잘잘못을 따지는 관청인 사헌부와 사간원, 왕의 자문에 응했던 홍문관은 조선시대 관리들이 근무하고 싶은 핵심부서였다.

김언거의 마지막 관직은, 1559년(명종 14)에 임명된 정3품직인 봉상시 정(奉常寺正)이었다. 봉상시는 국가의 제례 및 왕의 묘호(廟號)와 시호(諡號)의 제정 등을 맡아보던 기관이다.

김언거의 관직 생활은 무탈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는 ‘조선왕조실록’ 곳곳에서 발견된다. 명종 8년 연안부사였던 김언거가 시폐(時弊)를 상소하자, 사관은 “(김)언거가 처음에는 임백령에게 아부하여 장령이 되고, 송세형에게 아부하여 헌납이 되었다”며 공격하고 있고 “성품이 편협하고 시기심이 많았다”는 평가도 있다.

김언거에 대한 지나칠 정도로 부정적인 사관의 평가는, 을사사화 이후 외척인 윤원형의 세상이 된 명종 대에 벼슬했던 것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을사사화(乙巳士禍)는 1545년(명종 즉위년) 윤원형이 이기 등과 모의하여 윤임 일파를 역모죄로 몰아내면서, 윤임과 가까운 사림들이 대거 숙청한 사건을 말한다. 을사사화로 사사되거나 유배 간 사람만도 100여 명이나 된다. 윤임은 인종의 외삼촌이었고, 윤원형은 명종의 외삼촌이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윤임을 대윤(大尹), 윤원형을 소윤(小尹)이라 불렀다.

그런데, 윤원형과 함께 을사사화를 주도한 인물 중 한 사람이 해남 출신인 호조판서 임백령이었다. 임백령은 이 공으로 ‘정난위사공신(定難衛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숭선군(崇善君)에 봉해지지만, 호남 사림들의 원성을 산다.

그런데 호남 사림들에게 미운털이 박힌 임백령이 을사사화 이후 김언거를 사헌부 장령에 앉힌다. 사관이 김언거를 임백령에게 ‘아부’해서 장령이 되었다고 비난한 연유다.

하지만 사관의 비판적인 평가는, 김언거가 풍영정에서 평생 교유한 인물들의 면면을 보거나, 평가 시점이 명종대가 아닌 윤원형 일파가 쫓겨난 선조 초기라는 점에서 따져볼 필요가 있다.

-풍영정을 짓다

을사사화 직후 김언거는 세상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평판을 다 들었을 것이다. 예나, 오늘이나 정치판은 늘 시끄럽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이념도 다 팽개친다. 자신이 출세하기 위해 상대방을 물고 뜯는 곳이 정치판이다.

그런 삶이 김언거도 싫었던 것 같다. 그가 관직을 내려놓고 마지면 선창리에 내려온 것은 1560년, 그의 나이 57세였다. 그리고 극락강 변에 건립한 그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풍영정이었다.

정자 이름 풍영정에는 그의 인생 2막의 목표가 들어 있다. ‘풍영(風詠)’이란 말은 스승과 제자와의 격의 없는 대화 중 최고로 치는 대목인 ‘논어’ 선진 편에 나온다. 공자가 “만약 유력자가 너희를 인정해 준다면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의 답에 비파를 타던 증점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왈막춘자춘복기성관자오육인동자육칠인욕호기풍호무우영이귀(曰莫春者春服旣成冠者五六人童子六七人浴乎沂風乎霧雩詠而歸).” 이에, 스승인 공자가 무릎을 치며 칭찬한, 증점이 답변한 말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늦은 봄, 봄옷이 만들어지거든 어른 대여섯 명과 시중들 동자 예닐곱 명을 데리고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霧雩)에서 바람이나 쐬며 읊조리다가 돌아오는 그런 삶을 원합니다.” 증점은 당대의 권력과 호의호식을 버리고 자연에서 ‘유유자적’하며 사욕 없이 살고자 하는 자신의 뜻을 표현했던 것이다.

자연을 벗 삼은 증점의 사욕 없는 유유자적한 삶은 중앙 정치의 파벌싸움에 지친 김언거에게 동경의 대상이 된다.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쐬면 시나 읊조리겠다’는 것이 김언거가 추구했던 인생 2막의 목표였다.

-삐딱한 ‘풍(風)’자, 전설이 되다

무우에서 바람이나 쐬며 읊조리겠다는 증점의 답변에서 취한 정자 이름 風詠亭(풍영정)의 글자 중 ‘풍(風)’자가 다른 두 글자에 비해 다소 가늘고 삐딱하다. ‘풍’자가 가늘고 삐딱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또 만든다.

‘풍’자가 조금 가늘게 쓰여진 ‘풍영정’ 편액

김언거가 벼슬에서 물러난 후 고향인 선창마을 뒷동산에 정자를 지었다는 소식을 접한 명종은, 전라도 무주 구천동의 기인 갈처사에게 현판 글씨를 받아 걸라고 명한다. 현금 10량을 예물로 준비하고 만나 뵙기를 청했지만 12번이나 거절당한다. 13번째, 드디어 산간 오지 담배밭에서 갈처사를 만난다. 통성명이 끝나자마자 찾은 이유를 물은 갈처사는 즉석에서 칡넝쿨로 붓을 만들어 ‘風詠亭(풍영정)’이라는 이름을 써준다. 그리고 가는 길에 절대 펴보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글씨를 보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한 김언거는 잠시 쉬는 사이에 종이를 펴보았고, 순간 갑자기 돌풍이 불어 風(풍)자가 날아가 버린다. 갈처사를 다시 찾아 날아가 버린 ‘풍’자를 다시 써 주길 간청했지만, 갈처사는 크게 나무란 뒤 그의 제자 황처사를 소개해준다. 황처사에게 받은 글자가 ‘풍(風)’자다. 풍영정 현판을 자세히 보면 ‘풍(風)’자가 다른 글자보다 조금 가늘다.

풍영정은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타지 않고 살아남은 이야기도 품고 있다. 풍영정은 본디 풍영정을 비롯하여 11채의 정자가 더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때 왜인들이 다른 정자에 불을 다 지르고 마지막으로 풍영정에 불을 붙이자, 풍영영의 글씨가 각각 오리로 변하여 극랑강 물위를 떠다니게 된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왜인 대장이 서둘러 불을 끄라고 명한다. 그러자 물 위에 떠 있던 오리가 현판에 날아와 앉으면서 다시 풍영정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고 한다. 12개의 정자 중 풍영정 하나만이 오늘 남아 있게 된 연유다. 그럴듯한 상상력이다.

-풍영정을 찾다

무등산 자락과 영산강 변에는 100여 개가 넘는 정자가 있다. 나름대로의 경관과 사연을 안고 있지만, 단연 압권은 칠천 언덕의 풍영정이다. 동림동 쪽에서 하남대로를 따라 흑석사거리 쪽으로 가다 보면 광신대교가 놓인 영산강이 나온다. 영산강에 걸린 광신대교의 오른쪽 벼랑 위인 광산구 신창동 853번지에 위치한다.

풍영정은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댓돌을 딛고 정자에 올라서면 빽빽이 들어찬 제영현판(題詠懸板)이 시선을 압도한다. 서까래 밑과 들보 사이사이에 걸려있는 편액들은 고색창연한 단청과 잘 어울린다. 발밑으로는 극락강의 물줄기가 게으르게 굽이치며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아름다운 경관과 어우러져 자연 속의 시화전이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풍영정에 빽빽이 걸린 편액들

풍영정은 지난 2010년 국토해양부 4대강 살리기 추진본부와 익산지방국토관리청에 의해 영산강 주요 경관을 즐길 수 있는 8대 ‘명소’로 지정된다. 1경은 저녁노을에 물든 아름다운 영산석조(榮山夕照) 하구언, 2경은 강 위로 잔잔한 바람이 갈대숲에 스며들어 은은하게 마디마디 스치게 하는 곡강과 그림자가 잠깐 쉬었다 가는 식영정(息營亭), 3경은 바람을 따라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황포돛배와 영산강 절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석관정(石串亭), 4경은 꽃의 향연을 즐길 수 있는 죽산보, 5경은 황금물결 일렁이는 나주평야, 6경은 갈라진 물길이 합수되어 풍요로워진 물길 위에서 철새들의 날갯짓을 바라볼 수 있는 승촌보, 7경은 자연을 즐기며 시와 노래를 읊조린다는 뜻이 깃들어 있는 풍영정(風詠亭), 8경은 대나무 숲에 피어오르는 운무를 감상할 수 있는 대나무 습지 등이다.

오늘 풍영정의 경관은 빼곡하게 들어찬 나무들과 삐쭉삐쭉 올라선 고층아파트에 막히면서 그 멋이 덜하지만, 당시는 대단했다. ‘풍영정시선’에는 “풍영정에서 바라보이는 경관은 동으로는 무등 영봉, 남으로 금성산, 백리밖엔 소금강이라 불리는 월출산이 바라보이고, 북녘 담양 용추산에서 발원하여 연중무휴 흐르는 칠천(극락강)이 풍영정 절벽 기슭을 휘감고 돌아, 앞으로 십여리에 펼쳐진 백사장과 모래톱, 버드나무 숲 광활한 들녘인데……”라고 풍광을 표현하고 있다. 대단한 풍광이다. 이는 풍영정에 걸린 한석봉의 ‘제일호산(第一湖山)’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한석봉이 쓴 ‘제일호산’ 편액

경관도 대단하지만, 풍영정의 격을 한 층 더 높이는 것은 정자 안에 걸린 70여 개의 편액들이다. 이황이 써 보낸 아름다운 시문을 비롯하여 조식, 송순, 김인후, 유희춘, 기대승, 정철, 박광옥 등 당대 명현들의 시로 빽빽이 채워져 있다. 김언거의 문집인 ‘칠계집’에 84명의 교유 인사가 확인된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풍영정에 걸린 주인공 김언거의 “벼슬길에 있으면서 편히 쉬지도 못했는데, 높은 누각에 올라보니 모든 근심 사라지네. 달 따르는 한 그림자 노젓는 사공이요, 바람결에 들리는 소리 모래톱의 학이라. 소문난 곳답게 화려하게 장식해 두고, 지나가는 길손들 잠시 쉬어가라 하네. 난간에 기대앉아 여러 명사의 시편을 바라보면서, 칠수(漆水)와 나산(羅山)처럼 영원하기를”이라고 적힌 ‘풍영정 원운’은, 김언거의 인생 2막이 성공적이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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