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식 시인·시앤영 원장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양쪽에 피어있는 배롱나무 붉은 꽃들이 몹시 지쳐 보인다. 여름 한 철을 염천 속에서 견디느라 애를 태운 흔적이 역력하다. 절로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마주칠 때마다 몸이 후끈거리고 눈은 맵다. 저 모양으로 백일을 버티고 나서 어느 날 불현듯 가버리면 주위가 서늘해져서 우리는 가을의 중심에 서 있게 될 것이다.

들녘은 온통 녹음으로 꽉 들어찼다. 그 초록의 주단 위로 흰 구름이 지나갈 때쯤 지친 몸을 가로 눕힌 채 곤한 잠을 청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이른 벼가 빼꼼히 혀를 내밀고 올라오는 모습이 여기저기 보인다.

다음 주면 백로(白露)다. 조석으로 부는 바람은 가을을 실어 온다. 한낮의 이글거리던 햇살도 그 독한 열기가 풀리고 서서히 순해지는 것을 살갗으로 느끼게 된다. 저물녘의 태양은 더 이상 용맹스럽지 못하고 주눅 든 강아지처럼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며 산 아래로 떨어진다.

이제 밤이 오면 쓰르라미 소리에 잠을 설치게 되고 그렇게 한철을 보내야 할 것이다. 창문을 닫고 잠을 청할 이유는 없지만, 굳이 닫는다 해도 쓰르라미 울음소리는 어느 틈으로든 반드시 들어온다. 그 소리에 한번 귀를 빼앗기면 감미로운 음악 소리마저 소음으로 들릴 뿐이다. 이럴 땐 차라리 몸이 악기가 되어 쓰르라미 소리에 화답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몸과 마음이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밤에서 아침으로 이어지는 그 사이에 거미는 또 흰 줄 하나를 그어 놓았다. 대문이 없으므로 광나무 울타리 입구의 한 잎에서 맞은편 목련 가지의 한 이파리까지 3m의 거리를 이어놓은 것이다.

거미는 주인을 위해 밤새 제주도의 정낭처럼 줄을 하나 걸쳐놓았으나 찾아오는 이는 없었다. 거미는 이처럼 주인의 밤의 안녕을 빌어주듯 친절하고 자상한 면이 있다. 하지만 주인의 적막한 마음을 끄집어내지는 못한다.

한 번 자리 잡은 적막의 무게는 미동도 없이 앙금처럼 똬리를 튼 채 밤을 맞고 아침엔 풀린다. 이렇듯 밤이 온다는 것은 혼자의 삶 속에서 창작의 토굴로 깊이 들어가는 일과 같다.

시나브로 가을이 깊어 간다. 가을에는 혼자 있는 시간을 자주 가질 필요가 있다. 혼자 걷는다는 것은 자신을 오롯이 발견할 수 있는 평온의 세계다.

가을의 시인, 고독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김현승(1913-1975) 시인은 「가을의 기도」에서 노래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산다는 것은 자신을 비우지 않고는 불가능한 삶이다. 물기 없는 나뭇가지의 건실함과 외로운 까마귀의 겸손은 내면의 세계에서 건져 올린 자기의 전부다.

필자와 알고 지내던 어떤 여인은 어느 날, 한껏 멋을 내고 나왔는데, 귀를 보여주며 어떠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에메랄드빛 하트 모양의 스티커를 귓불에 얌전히 붙이고 있었다. 단순한 스티커로도 이렇게 멋을 부릴 줄 아는 여성이라면 참 평화로운 분이라 여기면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러므로 자신을 살찌우는 것은 귀금속이 아니다. 목걸이니, 귀걸이니, 반질거리는 손목시계가 다 무어냐. 무슨 ‘달 그림자’니, 무슨 ‘달빛’이니 떠들면서 허무맹랑한 소리로 자신을 변호한들 과연 ‘달님’이 믿겠는가? ‘달님’이 믿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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