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26일(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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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화의 '5월이야기']5월의 숨은 인물, 목포경찰서장 이준규를 보라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연구실장
국제학박사

  • 입력날짜 : 2020. 10.29. 19:09
80년 5월 그날, 그 때의 기억들이 전시로 꾸려졌다. 우리의 기억에서 자칫 잊힐 수 있는 인물들이 아직도 그날에 잠겨 있다. 그들을 기억하려는 몸부림으로 ‘ECCE HOMO-이 사람을 보라!’ 전시가 추진됐다. 전일빌딩245 9층에서다. 현재화되고 미래 기억으로 존재할 인물들이 40년 세월을 뚫고 우리에게 달려온다.

ECCE HOMO는 ‘이 사람을 보라’는 뜻의 라틴어로 로마총독 빌라도가 예수를 재판할 때 한 말이다. 고난의 삶을 살다간 예수를 상징하고 있는 문장이다. 니이체도 이 말을 자서전의 표제로 삼았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고난을 겪은 이들에 대한 발굴이 정말 의미있는 일이다. 잊혀질 수 밖에 없는 기억들을 꺼내본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현장에 있었던 경찰은 가해자인가. 아니다. 올해는 경찰의 날 75주년이다. 당시 전남 경찰국장이었던 안병하는 계엄군의 발포 명령을 거부했다. 80년 5월21일 전남지역의 각 경찰서나 지서들의 무기를 가급적 빨리 소산시키도록 지시했다.

목포경찰서장 이준규 역시 경찰 총기를 섬으로 모두 이동시켜 시위대와의 충돌을 최소화했다. 당시 전남도경 경무과장 양성우 또한 시민들의 무기탈취를 강경하게 막으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안병하는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후 강제사직됐고, 이준규 또한 직무 유기로 파면됐다.

양성우는 5·18 직후 감봉 처분 후 퇴직 당했다. 이 외에도 68명의 경찰관이 정직·감봉 등의 징계를 받았고 123명의 경찰관이 강제로 사직처리됐다. 경찰청은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이해 부당하게 징계처분을 받은 경찰관 21명에 대해 그 징계의 적정성을 검토했다.

이준규 목포경찰서장은 전남 장성 출신으로 1948년 순경이 됐다. 그로부터 2년 후 6·25전쟁 때 경찰가족이라는 이유로 온 가족이 몰살당했다. 53세가 되던 1980년 1월 전남 목포서장으로 부임했다. 5월21일 광주 금남로에 쏟아져 나온 시민은 20만명에 이르렀다.

금남로 시계탑 시침이 오후 1시를 가리키자,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총성이 울렸다. 이날 총격으로 인한 사망자는 최소 50여명이었다. 학살이었다. 계엄군이 시민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이었다. 국내 어느 언론도 이 참상을 보도하지 않았다. 침묵했다. 모든 통신 시설도 차단된 상태였다. 이를 알리려면 광주시민들이 직접 외부로 나가야만 했다. 계엄군의 총격 이후, 일부 광주시민들은 시외 무기고로 향했다.

목포도 그중 하나였다. 경찰기록에 따르면, 광주 시민군이 목포에 도착한 시각은 2시15분. 일부 무장한 120명가량의 광주 시민들이 목포로 진입했다. 목포 시내로 들어온 광주 시민군은 광주에서 벌어진 참상을 전하며, 목포 시민들의 궐기를 호소했다. 이내 목포역 광장엔 수만 명의 시민들이 운집했다.

“강제진압 하라”는 신군부의 명령이 하달된 상황에서, 이준규 서장이 선택한 길은 신군부의 명령에 대한 거부였다. 그는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당시 이준규 목포서장은 구내 방송을 통해 ‘시민들에게 발포하지 말라고’ 경찰들에게 명령한다. 목포경찰은 시내 곳곳에 정보경찰을 심어 놓고 21일 오후 늦게 경찰서에서 철수한다. 경찰이 철수한다고 하더라도, 경찰서 내에는 사용할 수 있는 총기가 없었다.

이준규 서장의 지시에 따라, 이미 총기에서 공이를 분리해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리된 공이는 목포 인근 섬인 안좌도와 고하도 등지로 이동시켰다. 이준규 서장은 시위대를 이끌고 있는 재야인사들과 끊임없이 접촉을 시도했다.

이런 소통을 통해 무기 회수도 빠르게 이뤄졌다. 목포항쟁은 광주와 비교해 큰 인명피해 없이 진행됐다.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인근 섬 등으로 이동시켰던 경찰력도 23일 복귀했다. 10만명까지 운집 인원이 불어났던 목포항쟁은 광주에서 계엄군이 시민군을 완전히 진압한 이후에도 하루가량 더 지속됐다.

당시 광주 이외에 유일하게 전 시민이 나서서 체계적으로 시위를 한 곳은 목포 뿐이었다. 그럼에도 목포관내 사태보고에 기록된 목포항쟁 인명피해는 사망 1명, 부상자 11명에 그쳤다. 계엄군의 강제진압으로 사망자 수를 헤아릴 수 없게 된 광주의 상황과 크게 비교된다. 시민들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인명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이준규 서장의 조치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가.

신군부는 무고한 시민들을 보호했던 이준규서장을 비롯해 경찰인사들을 고문하고 파면시켰다. 신군부의 총칼에 무자비하게 쓰러져간 시민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상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던 이들은 신군부의 폭압에 허물어진다. 왜 이들은 고난을 겪어야만 했을까. 그게 아직도 의문이다. 우리가 그들을 보아야 하고 기억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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