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인석 광주문인협회 회장

문병란 은사님, 그리운 마음에 불러봅니다. 제가 문학에 대해 불확실할 때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던 건 크나큰 행운이었습니다. 저에게는 방황의 고교시절이 있었고 손에 잡히는 대로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 유주현의 『대원군』, 정비석의 『삼국지』, 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한국단편 문학전집』 등을 읽어나갔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를 문학에 심취하게 한 동기는 아무래도 『한국단편 문학전집』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그때 저는 보석 같은 한국 문학의 작가들을 하나둘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광수, 김유정, 채만식, 염상섭, 이상, 나도향, 현진건, 이태준, 김동리, 황순원 등이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었거든요. 대학에 들어가 교수님의 강의는 제가 새롭게 개안(開眼)할 만큼 명쾌했지요. 한국단편에 심취한 저에게 교수님은 푸시킨,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까뮈 등 세계문학의 거장들을 종횡으로 넘나드셨습니다. 정의란 무엇이고, 시창작은 어떻게 하고 등등을 강의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어제처럼 눈에 선합니다. 교수님이 계셨기에 저에게 문학의 영역이 확장되고 열정 또한 커졌다 하겠습니다. 세월로 쳐서 50년을 훌쩍 넘겼지만 지금도 생생한 것은 문학의 영원성을 웅변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교수님께서는 개인적으로도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교수님을 지산동 한 주점에 초대했는데 으슥한 밤인 데도 늦은 시간까지 함께 하셨지요. 그 자리에서의 교수님은 솔직히 친구와 같은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신분의 차이, 나이의 차이, 문학수준의 차이에도 이퇴계와 기고봉이 펼친 사단칠정의 교유처럼 어떤 격차를 갖지 않은 인간적 친근감 그 자체였습니다. 보성 율포 어느 횟집에선가 동행한 사람들의 좌중대화를 주도하시고 즉석에서 시도 읊으시고 술도 맛있게 드셨지요.

현대시를 창작하고 가르치시는 교수님께서는 한국문학과 세계문학, 운문과 산문 그 모두를 실로 해박하게 넘나드셨지요. 언제 술 마시고 언제 독서하시고, 언제 작품 창작을 하시는지 저 같은 사람에게 교수님은 다른 차원에 계신 것만 같았습니다. 특히 ‘사상계’에 발표돼 세상을 뒤집어놓을 듯 놀라게 한 김지하 시인의 담시 ‘오적’을 강의하실 때는 우리 모두가 기립박수를 치며 좋아했었지요. 당신의 고향인 화순 도곡의 문필봉 바위를 말씀하시면서 큰바위얼굴처럼 그 형상 밑에서 당신의 문학적 토양을 만드셨다는 말씀도 그리 신기할 수가 없었지요.

교수님께서는 젊은 날 고전독서를 많이 하라고 권하셨는데 그리 못한 아쉬움이 큽니다. 저에게는 대학 시절에 시작품보다는 현대단편소설 위주로 흥미가 꽂혔던 것 같습니다. 이청준, 황석영, 김승옥, 조세희 등등을 독서하면서 나를 유독 사로잡았던 작가는 최인호였고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별들의 고향’에 몰입했었지요. 술을 마셔도 주인공이 마시던 방식대로였으니까요. 교수님의 문하에서 문학으로 돋보였던 이들로는 김종 시인, 김준태 시인, 설재록 소설가, 손동연 동시작가 등이 생각납니다. 모두 훌륭한 문인으로 성장해 한국 문단에 중견이 된 작가들입니다. 이 모두가 교수님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제가 광주대학교에 재직 중일 때 유아교육과에 따님을 보내시고는 새벽에 쓰신 장문의 편지로 잘 보살피시라고 하신 서신에서 자별한 부정(父情)을 느꼈습니다. 그 뒤에 교수님께서는 독재정권에 맞서면서 많은 고초를 겪으셨는데 가깝게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다행히 후학이나 제자들이 은사님을 기리면서 ‘서은문학제’로 그 정신과 감동을 이어가고 있어서 그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는 광주문협회장의 자리에서 교수님을 기리는 행사에 기회를 얻게 되어 행복하다 여기고 있습니다. 황일봉 이사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고 이근모, 공옥동, 홍영숙, 김숙희, 강숙자, 김양자 등 여러 시인들이 교수님의 문학정신을 펼치는 선두에서 매진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나라 통일문학의 기수이신 교수님을 광주시에서 하루 빨리 ‘문병란 시인의 날’을 제정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언젠가는 그리 되리라 생각하지만 이는 빠를수록 좋다는 생각이고 광주가 민주의 성지를 다지는 가장 확실한 길이 아닌가도 생각합니다. 교수님 12월8일은 ‘서은문학제’의 날입니다. 교수님의 명복을 빌고 행사마당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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