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이 낳은 조선 중기 대유학자이자 왜열도 성리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수은 강항(睡隱 姜沆) 선생을 배향한 내산서원 전경. 영광군 불갑면 방마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알림=본보는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임진란과 이후 광주·전남 의병활동과 전적지, 의병장 등을 발굴해 본란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062-650-2060

“어린 놈 용이와 첩의 딸 애생의 죽음은 너무도 애달프다. 모래사장에 밀려 물결 따라 까막까막 하다가 그대로 바다 깊숙이 떠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엄마야! 엄마야! 부르던 소리 아직도 귓결에 들려온다. 그 소리마저 시들어질 때, 산 아비가 살았다 할 수 있겠는가!” <강항의 ‘간양록(看羊錄)’ 중에서>

지독한 고통 속에서 자식을 잃고 살아남은 아비는 구차한 목숨을 던져버리기 위해, 왜놈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몇 번의 탈출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일본 본토에까지 끌려가고 만다. 대항할 수 없는 폭력 앞에 선 존재의 무력함이란 얼마만한 깊이로 떨어지는 것일까. 영광 불갑 출신의 조선 중기 문신이자 의병장이었던 수은(睡隱) 강항(姜沆·1567-1618)의 이야기다.

강항은 1593년(선조 26) 27세가 되던 해 과거에 급제했고 정자·박사·전적을 거쳐 공조좌랑, 형조좌랑에까지 올랐던 인물. 그는 1597년 고향인 영광에 휴가를 얻어 내려 왔다가 정유재란을 만났다. 그해 5월 남원성 사수의 책임을 맡은 참판 이광정(李光庭)의 보좌역이 돼 군량미를 모았으나 이미 성이 함락돼 허사가 됐고, 이어 고향에서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의병을 모았으나 이마저도 병사들이 도망쳐 실패하고 말았다. 영광이 함락되자 그는 가솔들을 이끌고 논잠포(지금의 영광군 염산면 상계리)에서 피난길에 오른다.

배 두 척에 나눠 탄 그의 가족들은 여러 날을 영광 앞바다에서 헤매다 결국 이순신의 휘하로 들어가기로 작정했으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짙은 안개 속의 왜군들이었다. 그와 일가족들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수심은 얕았고 그들은 왜놈들이 던진 갈고리에 걸려 끌어 올려진다. 그 와중에 강항은 어린 자식들을 둘이나 잃고 만다.

내산서원 내 의절묘(義節廟)의 정문인 여재문(如在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전투부대 외에도 도서부, 공예부, 포로부, 금속부, 보물부, 축부로 구성된 6개의 특수부대를 조선에 보냈다. 왜군들은 책, 도자기, 각종 활자본, 가축을 탈취하고 도공, 공예기술자, 지식인을 납치했다. 물론 조선에 비해 뒤떨어진 문물을 일본에 이식하기 위함이었다.

일본 오쓰성(大津城)에 유폐된 그는 특별대우를 받는다. 남녀 2명의 종이 딸렸고 책도 볼 수 있었으며, 이곳 저곳을 돌아다닐 수도 있었다. 그곳에서 강항은 일본사회의 지식층인 승려들과 친교를 맺는다. 그는 또 다시 탈출을 시도했다가 처형장까지 끌려갔지만 쇼군이 존경하는 ‘카이케이’라는 승려의 도움으로 살아나고 ‘후지와라 세이카’라는 승려의 도움을 얻어 결국 1600년 탈출에 성공한다.

당시 일본의 장군들은 대다수가 글을 읽지 못했으며 승려들이 유일한 지식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일본 귀족의 젊은이들이 그러했듯 후지와라 세이카도 승려가 돼 불경을 공부했으나 학문에의 열정이 높던 그는 ‘지식인 포로’ 강항을 찾는다. 그는 강항이 인도하는 조선유학의 새로운 빛에 압도돼 승복을 벗어 던지고 유복(儒服)을 입기에 이른다.

애초의 시작은 조선에 돌아갈 배를 사기 위한 금전 마련에 있었으나 강항은 그의 학문적 열정에 감탄하여 암기하고 있던 사서오경을 필사해 주는 등 후지와라 세이카의 스승이 되어주었다. 이를 통해 후지와라 세이카는 에도시대의 통치이념으로 유학을 도입한 일본주자학의 시조가 되었다. 그에 따라 일본학계에서는 일본유학의 계통을 이황-강항-후지와라 세이카-야마자키 안 사이로 본다.

문벌이 높은 문인학자였던 강항은 왜(倭)의 땅에서도 지방 토호의 보호 속에 일본에 퇴계학(退溪學)을 전한 유학의 스승이 되었고, 그 옛날 백제의 왕인(王人) 박사가 천자문을 전했던 뱃길로 그는 다시 조선 유학의 씨를 뿌린 제2의 왕인박사였던 것이다.

정유재란이 끝난 뒤 일본에 간 조선통신사 여우길(呂祐吉)은 포로생활 4년 강항의 행적에 대해 “일본에 갔을 때 왜인들이 그의 절의를 몹시 칭찬했는데…있는 동안 모습이나 의관을 바꾸지 않은 채 지냈다”<‘현종개수실록’ 중>고 전했다. 강항은 일본 포로였지만, 조선인으로서의 모습을 끝까지 지켰다.

내산서원에 있는 강항 선생의 동상.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우리나라를 재침략하려 할 때 여러 장군들에게 이르기를 “사람마다 귀는 둘, 코는 하나다”라면서 졸병마다 목 대신에 조선인들의 코를 베어 올리게 했다. 귀와 코가 잘린 어린아이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우는 소리가 온 산천을 진동했던 시절이다. 강항에게 이 모든 일들은 가족을 잃은 자신의 개인적 아픔을 넘어 일본 포로로 무기력하게 생을 이어야 했던 역사적 상처까지 더했다.

그는 일본에서 돌아온 뒤 임금 앞에 나아가 일본생활의 실상과 행적을 아뢰고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자신을 부끄러운 죄인으로 칭하고, 벼슬을 내려도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고향인 영광에서 후학 양성에만 전념, 윤순거(尹舜擧)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인물화와 소나무를 그리는 데도 뛰어났다.

특히 조선인이 일본유학의 비조가 되고, 풍속, 지리, 역사, 군사, 정세는 물론 그들의 후진성과 야만성을 낱낱이 기록한 강항의 ‘간양록’은 일제시대 금서의 하나였다. 또 ‘간양록’은 같은 이름의 방송극과 조용필의 애끓는 주제곡으로도 널리 알려진 임진란 실기문학이며, 강항의 자취는 그가 머물렀던 일본 땅 애원현대주시(愛媛縣大洲市)에 지금껏 역력하다.

이후 강항은 1618년 부친상의 복을 벗은 지 한 해 지나 세상의 일을 마친 듯 세상과의 질긴 끈을 놓았다. 1882년(고종 19) 이조판서·양관대제학이 추증되었으며, 영광 용계사(龍溪祠)에 제향됐다.

이처럼 조선의 임진왜란-정유재란에 휩싸인 시대를 살다간 강항의 흔적은 영광군 불갑면 방마산 기슭에 자리한 내산서원에 고스란히 배어있다.

/글=진은주 기자 jinsera@kjdaily.com

/사진=김애리 기자 kki@kj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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