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나무 그늘 한편에서 사발막걸리에 샛밥을 먹던 논들이 메워지고 트럭들이 부산히 움직이는 읍내는 진화 중이다 노인의 집에 서울 사위가 내려온 날 암탉의 마지막 울음소리를 기억하는 걸까 수탉이 한낮에 온 마을을 뒤흔든다 몇 채의 한옥들이 드문드문 서 있는 곳까지 널찍한 신작로가 가로 지나 뚫리는 때를 …2021-12-20 18:56

▶시 ‘그대 흰 손의 겨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흰 손의 겨울을 그대라 칭하고 있다. 백설처럼 흰 그대, 눈송이로 날아와 시적 화자의 마음에 닿으려 한다. 그대 흰 손의 겨울을 만나면, 시적 화자는 한 송이 백설 같은 겨울이 되고 만다. 그런데, 그대는 백옥처럼 차다. 별빛으로 떨어져 발자국마다 고이는 그대, 그대를 안으면, 아픈 이름의 백옥 같은 사랑이 된다. 사랑하고픈데, 영원히 하나되고픈데, 차가와서, 아픈 사랑이라서, 아름답지만 하나되지 못하고 …2021-12-20 18:56

그대는 백설처럼 희다 눈송이로 날아가 내 마음이 닿으려는 그대 흰 손의 겨울을 만나면 나는 한 송이 백설 같은 겨울이 된다 그대는 백옥처럼 차다 별빛으로 떨어져 발자국마다 고이는 그대 흰 손의 겨울을 안으면 너는 아픈 이름의 백옥 같은 사랑이 된다. ▶1990 한국시 등단 ▶전남 예술상(문학)…2021-12-20 18:56

무심코 흰 구름이 앞산으로 내려 온 게 한 계절이 가고 있다. 높은 산 보다는 낮은 야산이 더 늙어서 자비로운 어머니 산이어서다. 촉촉한 가을비 그리고, 시원섭섭한 바람이 지나고 나면, 가슴은 푸르지만 온갖 가을 소리에 물감을 덧칠한 정열의 옷을 입었다. 색깔을 준 것은 자연이지만, 능선이 겹겹한 …2021-12-20 18:56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비는 개어 있고 공기는 상쾌했다. 꽃들은 안녕하시겠지? 공원에는 벚나무가 많았다. 나무는 삽시간에 피어난 꽃들로 구름처럼 부풀어 있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벌들도 잉잉거렸다. 봄기운 창만한 그 아래를 나는 다시금 서성거려보고 싶었다. 공원길엔 벌써 꽃잎이 깔렸다. 어찌 하필 바람은 그…2021-12-20 18:56

손때 묻은 저울을 보면 실오라기 같은 눈금 하나 가지고 밀고 당기던 궁핍한 그림자가 꿈틀거린다 시골 장 어귀에서, 한사코 저울대 머리 쪽으로 추를 끌어당기려는 꾼 그 반대편으로 추를 끌고 가고픈 애절한 농심 눈물 한 방울 갈고리에 걸어 보면 어느 눈금에서 춤을 출까 사랑한다는 말 피皮 떨고 나면 몇 근…2021-12-06 18:37

▶시 ‘손저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손때 묻은 손저울의 눈금을 바라보고 있다. 거기서 눈금 하나 가지고 밀고 당기며 살아가는 농부의 마음을 발견한다. 시골장 어귀에서 흔히 만나는 정경, 긴장감이 팽팽히 서로를 당기고 있다. 한 쪽은 저울대 머리 쪽으로 추를 끌어당기려는 꾼, 다른 한 쪽은 그 반대편으로 추를 끌고 가고픈 농부. 어느새 눈물 한 방울이 갈고리에 걸린다. 눈금 위에서 춤추는 세파, 궁핍한 그림자, 그리고 쌓이는 한숨 소리. 여기서 또 하나의…2021-12-06 18:37

가슴속 간직한 꿈 절절한 외침인가 향긋한 그대 입술 잔물결 타고 나와 사내들 눈물까지도 끌어내는 호소력 은달빛 새어들면 가야금 튕기면서 한 서린 매듭 풀 듯 엮어 간 감성들이 가늘고 낮은 목소리 심장까지 스민다 유혹의 콧소리에 그 누가 지나치랴 단아한 저 뒤태에 마음도 뺏기더니 밤새운 이별가에는 …2021-12-06 18:37

마주한 표현이 머문 기억도 금세 노안인 계절 탓을 닮아갑니다 그리 귓전을 간지럽히던 꿈이 따라나선 길 비스듬히 내디딘 신호가 바뀔 때면 편들어줄 거란 마른 하늘도 뜀박질이 좋던 목적어는 기다림입니다 돌잡이 끝난 다짐을 피울까요 뉘 정성을 이리 높였나 청춘은 어제를 묻고 가슴은 눈이 들어간 하늘…2021-12-06 18:37

산문을 지나 일주문을 거치고도 한참 동안 산길을 올라가야 하는 곳에 스님이 정진하던 법당이 있다. 인적이 드물고 산중 나무와 짐승들이 함께 사는 곳이다. 사철 꽃들이 피었다 지고 새소리 울려 퍼지는 산 중턱에 숨어든 듯 외딴곳이다. 한 발 한 발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리며 세상의 무거운 짐을 덜어내어 가난해지려…2021-12-06 18:37

어린 시절 어머니 내 터진 옷 기워 주실 때 바늘구멍에 실 꿰는 일은 항상 나를 시키셨지 그때 내 나이 아홉 살쯤이었던가 기다란 무명실 입술에 침 발라 두 손가락 사이로 다시 한 번 가늘게 실 끝 가다듬어 바늘 코에 몇 번의 노력 끝에 성공했던 실 꿰기 어머니와 나의 거리를 뱅뱅 도는 석유 등잔 불빛 아래…2021-11-22 19:30

▶시 ‘골무꽃’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옷 기워 주던 추억을 떠올리고 있다. 아홉 살쯤 된 시적 화자는 바늘구멍에 실 꿰는 일을 어머니 곁에서 즐거이 도와주곤 했다. 무명실을 입술에 침 발라 실끝을 가다듬어 바늘코에 끼워 넣었다. 그것으로 어머니는 시적 화자의 터진 옷을 말끔히 기워 주었다. 그때 어머니의 손가락에 끼워졌던 골무, 어느 날 시적 화자는 그 골무를 떠올린다. 그와 동시에 꽃 속에 골무 품고 피어나는 꽃들의 신호를 보게 된…2021-11-22 19:30

잊고 싶지 않거니와 잊어버릴 수도 없네요 우리 인연 소중함을 말 안 해도 잘 아는데 나 어찌 그대의 눈빛 외면할 수가 있겠는가요 물 흐르듯 흘러만 가는 세월 따라 살면서 보니 그대가 바로 눈 밝은 빛 온 산야를 휘감아 비추는 나 그대 곱게 그리며 느긋이 껴안고서 살래요 ▲‘문학춘추’…2021-11-22 19:30

저녁의 불빛이 건너오는 시간 노을은 다리를 어둠의 강가에 놓아 푸슬푸슬한 기억의 단편들을 걷어 올린다 바람이 하루까지만 살다가 돌아간 자리 그리움의 연기 가득 피어 오르고 승강장을 출발한 구름들은 저마다 시린 깃발을 흔들며 위태롭게 출렁거린다 칼 끝에 선 하늘 언저리 강물속으로 머리를 처박고 …2021-11-22 19:30

어린 시절 여름밤은 꿈속의 세계였다. 밤하늘에 초롱초롱한 별들을 바라보며 먼 꿈의 나라로 여행을 떠나곤 했다. 마을 앞에는 잘 다듬어진 묘가 하나 있었고 우리들은 묘지 옆 풀밭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별자리 이름을 부르며 하늘을 날아올랐다. 풀벌레 소리, 소나무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 시냇물 소리에 귀를 기울…2021-11-22 1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