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정신은 민족의 자존과 연결된다. 나라가 위기에 처해있을 때 마다 정의감에바탕을 둔 저항정신이 빛을 발휘했다. 임진왜란에서부터 동학농민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역사적 맥락에 의해 하나의 정신으로 이어져 내려온 역사다. 사진은 지난 2008년 9월 진도군 울돌목에서 펼쳐진 명량대첩 재현 장면.

임진란 승리 이순신 장군 “若無湖南 是無國家”
광주서 시작 학생독립운동 민족기상 세계 알려

1993년 5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5·18에 대한 문민정부의 입장을 천명했다.
“80년 5월 광주의 유혈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오늘의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 민주정부다.”
신군부의 일원으로 학살의 배후에 있던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 5·18이 처음으로 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됐지만,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촉진시킨 주인공으로서 숭고한 의의를 인정받기는 13년만이었다.
이후 들어선 정부도 앞 다퉈 광주민주화운동과 광주정신 계승을 내세웠다. 2000년 5월 18일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광주 망월동 5·18 묘역을 찾은 김대중 대통령은 “정부는 5·18 항쟁의 고귀한 정신과 값진 헌신이 역사속에 영원히 기억되고 크게 선양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2003년 5월 18일 취임 후 처음으로 5·18 국립묘지를 찾은 노무현 대통령도 “참여정부는 5·18 광주의 위대한 정신을 계승해 역사의 소명인 국민통합을 반드시 이뤄내겠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군사정권 이후 들어선 3번의 정부가 이구동성으로 계승을 거론했던 ‘광주정신’은 평소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충절’(憂國忠節)의 자세가 위기때마다 행동으로 터져나온 호남인 본연의 모습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80년 5월 16일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시국성토대회를 하고 있는 광주시민들.

‘절상호남 국가지보장 약무호남 시무국가(竊想湖南 國家之保障 若無湖南 是無國家)’. ‘즈윽이 생각하건데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다. 만일 호남이 없으면 그대로 나라가 없어졌을 것이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1년2개월여가 지난 1593년 7월 16일 이순신 장군이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 포함돼 있는 글이다.
이 글에서 이순신 장군은 지정학적 위치로서의 전라도의 중요성과 함께 호남인들의 우국충절에 대한 정신을 높이 사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를 제외한 전 국토가 왜인들에게 짓밟혀 있는 상황에서 호남인들은 수군을 위해 뱃길을 잡아주고, 군량미와 인력조달에 앞장서는 등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헌신했다. 그 결과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은 진도와 거제, 남해, 통영의 해전에서 잇따라 승리, 23전 23승이라는 불패의 신화를 만들었다.
이와함께 고경명·김덕령·최경회·김천일·유팽로 등 호남지역 의병장들이 보여준 충절의 정신도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이를 높이 평가해 글을 남긴 것이었다.
1894년 1월 고부(古阜)농민 봉기로부터 시작돼 동학농민군이 전국을 휩쓸었던 ‘갑오동학농민운동’ 역시 광주정신의 밑거름이 된 역사적 사건 중 하나다. 수십만의 희생자를 낸 채 좌절됐지만, 봉건적 사회질서를 타파하고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세운 우리 역사상 최대규모의 민중항쟁이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결정지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던 동학농민운동 당시 호남지방에서만 모인 농민군 수만도 11만명이 넘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된 모형도.

올해로 81주년을 맞는 광주학생독립운동도 광주에서 시작됐다. 1929년 11월 3일 시작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5개월 동안 서울·부산 등 전국으로 확대돼 만주 일본 등에까지 번져나간 대표적 항일운동이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우리 민족의 기상을 세계만방에 알린 위대한 민족운동이었다. 이처럼 호남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마다 분연히 일어났다. 임진왜란, 동학농민혁명, 한말 의병운동, 일제강점기 농민운동, 학생독립운동 등을 통해 보여준 우국충절의 정신이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소설가 문순태(69)씨는 “동학농민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민족의 자존을 찾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것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며 “동학이 우리지역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면 광주학생독립운동이나 5·18이 발생했을 것인가를 되돌아 봐야 한다”고 말했다.


5.18, 저항에너지의 결정체
오 승 용 전남대 연구교수·정치학

사회운동 전공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개념 중에 ‘저항에너지’가 있다. 실증하기는 어렵지만, 집단적 체험을 통해 습득한 저항정신이 세대를 통해 전승돼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폭발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그 간격은 몇 년 후가 될 수도 있고, 몇 십 년 후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물리적 시간만을 놓고 보면 많이 떨어져 있는 사건들이 불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동일한 시대정신을 공유하고 있는 경우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 동안 5·18에 대한 성격규정은 신군부의 집권과정에 국한해 논의됐다. 실증적으로는 유효한 접근이지만, 5·18의 역사적 맥락을 온전히 설명하는 데는 뭔가 부족하다. 5·18은 오랜 기간 전승·축적된 지역사회의 저항에너지와 신군부의 불법적인 권력 장악 시도가 맞부딪치는 과정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이다. 따라서 5·18 당시까지 지역사회에 축적된 저항에너지의 기원과 원천이 무엇인지를 질문해보는 것은 5·18 30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무척 의미 있는 일이다. 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장 5·18의 시발이 됐던 전남대 정문 앞 시위를 주도했던 다수는 1978년 6월에 발생한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관련자들이다. 이 사건은 광주지역 학생운동의 저변이 확대되었음을 확인시켜주었으며, 이는 1974년 4월의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집단적 체험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민청학련 사건은 1968년 12월의 삼선개헌반대투쟁의 연장선상에 있었고, 이에 앞서 광주지역 저항운동의 수준을 비약적으로 도약시킨 것은 1964년 3월의 한일회담 반대시위와 1965년 8월의 한일회담 비준 반대 시위였다. 한일회담 반대시위는 5·16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의 폭압에 억눌려 있던 지역사회의 저항운동이 다시 기지개를 켤 수 있도록 했다. 이 시위는 한편으로는 4·19혁명 공간의 복원이라는 시대정신의 공유와, 다른 한편으로는 4·19혁명 직후 광주지역 정치를 주도했던 청년운동과 혁신계 활동가의 지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광주의 4·19혁명은 1929년 11월 3일 발생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체와 정신을 직접적으로 계승했다. 4·19혁명 직후 정치공간을 주도했던 인물의 상당수가 광주학생독립운동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이처럼 1980년 5·18부터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까지 주체와 저항 대상은 비록 달랐지만 이들 사회운동의 기저(基底)에는 불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공통의 대의(大義)가 공유되고 있었고, 집단적 체험과 지속적 참여를 통해 저항 주체가 재생산됐음을 알 수 있다. 저항에너지의 축적과 폭발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5·18은 4·19혁명은 물론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저항정신과 에너지를 원천으로 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5·18은 단지 광주만의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정성문 사회부 차장
▲김기식 사진부 차장대우
▲이홍주 사회부 기자
▲오경은 사회부 기자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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