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터너 作 ‘템즈 강변의 클라이브덴’<위키피디아 검색>

푸릇푸릇 생명이 태어나는 계절 봄이 지나고 강한 햇살 아래 녹음이 짙던 여름마저도 지나쳐 대지의 모든 것들이 결실을 맺는 가을이 왔다. 때아닌 초가을 장마가 조금 무색하긴 하지만 시간은 흘러 흘러 울긋불긋 아름다운 계절을 우리 앞에 다시 가져다 놓았다. 단풍 구경하러 어디라도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그것마저도 녹록지 못해 더욱 애잔한 계절이다.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거둬들이듯 이 계절에 어울리는 단어는 아마도 ‘결실’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결실에는 어떤 씨앗을 심었느냐에 따라서 참으로 다양한 것들이 있을 수 있겠다. 어떤 이는 학업으로 또 어떤 이는 사업으로 게다가 혹 그 어렵다던 다이어트에 성공한 분들이 계시기도 하겠다.

2021년 한 해도 벌써 반환점을 돌아 몇 달 남겨두지 않았다. 독자들이 꾸려놓은 일련의 성과들은 얼마만큼 자라났는가? 필자 역시도 올 한해 열정을 가지고 시작했던 일들이 하나, 둘씩 마무리를 앞두고 있는 상태라 너무 바빠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매번 즐거울 수만은 없고 달리다 보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 오늘도 한 걸음 한 걸음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이번 달에는 온 세상을 알록달록 물들인 가을에 어울리는 컬러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가을 하면 떠오르는 색은 당연히 ‘갈색’이 아닐까? 무성하게 자라난 나무 밑둥도 나무에 달린 잎사귀들까지도 모두 갈색계열로 예쁘게 물들고 있으니 더욱 그렇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갈색하면 떠오르는 필자의 기억은 어릴 적 엄마 몰래 거울 앞에서 발라보던 립스틱이다. 어릴적 한 번쯤 해봤을 화장 놀이에 하필이면 갈색 립스틱이 등장하는 이유는 지금 보면 너무 촌스럽지만 90년대 초 트렌디 컬러가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이외에도 흙, 낙엽, 대지 등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갈색은 자연의 색과 연관된 따뜻한 색으로 편안함과 안정된 분위기를 전해 줄 수 있는 색상이다. 산전수전을 겪어 낸 듯이 묵직하게 자리잡고 있는 듬직한 대지처럼 갈색은 그 깊은 속내와 수 없는 세월의 흔적 그리고 사연이 배어있는 것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런 푸근함에 갈색은 ‘노년을 상징’하기도 하고, 응축된 생명을 담고 있는 씨앗들의 색이 갈색을 띠고 있어 ‘수확의 계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계절이 깊어가며 초록에서 빨강 그리고 주황, 황갈색으로 변한 낙엽이 마침내 떨어져 부식과정을 거쳐 다시 땅으로 돌아가듯, 갈색은 ‘죽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빨강, 파랑, 노랑, 3원색으로 이루어진 갈색은 이 색들이 섞인 비율에 따라 옅은 베이지에서 어두운 갈색까지 다양한 뉘앙스의 갈색을 만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갈색계열은 중후하고 지적인 느낌을 주는 색상이다. 옅은 색조의 갈색은 부담스럽지 않은 밝은 느낌을 주고, 어두운 갈색은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데 배색을 잘못해 조화가 맞지 않으면 세련된 이미지 대신 오히려 평범하고 진부해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갈색으로 캐주얼한 이미지를 연출하고자 할 때는 초록이나 파랑으로 조화를 이끌어 내보면 좋고, 여성스러운 이미지를 나타내고 싶을 땐 소프트한 핑크를 코디해 보는 것이 좋다고 한다. 이렇게 패션에서도 활용도가 높은 갈색은 잘 사용하면 가을에 어울리는 트랜디한 모습을 연출할 수 있는 컬러이다.

버버리 포스터. <위키피디아 검색>

갈색이 사용된 가을 패션 아이템으로는 트렌치코트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체크 무늬와 함께 가장 먼저 연상되는 브랜드 버버리도 빼놓을 수 없다. 버버리도 처음부터 명품은 아니었다.

처음 시작은 토마스 버버리라는 젊은 사장이 차린 작은 옷가게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세계적인 브랜드로서 자리 잡았다.

영국 날씨는 잘 알다시피 비가 오는 날이 해 뜨는 날보다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연간 비 내리는 날이 300일이 넘는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 않겠나. 그 때문에 영국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비로부터 신체를 보호해줄 옷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지금처럼 방수가 되는 레인코트 개념의 옷이 없어서 크고 무거운 고무를 걸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에 버버리는 농부와 마부들이 일할 때 걸치던 코트에 착안해서 1888년 방수성이 뛰어난 개버딘 원단을 개발하며 패션에 희대 바람을 몰고 오게 된다. 이런 탄생 배경을 갖는 옷이 바로 트랜치코트다.

그리고는 1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트랜치코트는 사랑을 받고 있고, 처음 출시됐던 것과 거의 유사한 구조로 만들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레트로풍 열풍과 함께 영한 이미지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기도 하다.

가을 명화로는 영국의 화가 윌리엄 터너의 작품들을 소개해 볼 수 있겠다. 특히 템즈강의 풍경을 그린 작품처럼 초반에 그렸던 단정한 풍경화들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편안함을 선사해 줄 뿐만 아니라 가을 분위기마저 물씬 풍겨낸다.

이후 후반 낭만주의 단계의 화법을 보이는 작품들에서는 단순 풍경화를 넘어서 터너의 감정이 듬뿍 담긴 갈색계열의 아름다운 색채의 향연을 볼 수가 있다.

윌리엄 터너 作 ‘노예선’ <위키피디아 검색>

작품 ‘전함 데메테르’의 하늘 묘사에서 보이는 낭만주의 기법이 작품 ‘노예선’에서는 전 화면에 걸쳐 거친 붓 터치와 강렬한 색감으로 진화해 터너의 감정을 여과없이 그대로 작품에 반영시켜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터너는 재능을 일찍 알아본 아버지의 후원 덕에 14세에 왕립아카데미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하며 화가로서의 꿈을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이듬해 왕립학회에 작품이 전시되며 그의 그림은 귀족들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된다. 18세부터는 개인화실을 갖추고 이후 이십 대에 왕립아카데미 정회원이 돼 성공의 절정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고 아카데미의 원장까지 거치며 화가로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은 다 누리게 된다.

19세기 인상파 화가에게 많은 영향을 준 낭만주의 화풍의 터너식 풍경화는 그림 속에 스토리를 부여해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당시 유럽에 끌려와 노예가 돼야 했던 아프리카인들의 불쌍한 상황을 작품에 담은 ‘노예선’과 그를 영국의 국민화가로 만들어 놓은 작품 ‘전함 데메테르’ 또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윌리엄 터너 作 ‘전함 데메테르’<위키피디아 검색>

그림 속에는 1805년 나폴레옹과 영국 사이 벌어졌던 트라팔가르 전쟁에 사용된 데메테르 전함이 그려져 있고, 그 앞에는 당대 영국의 최신기술을 보여주는 작은 증기선이 거대한 군함을 인양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영국의 위상을 높여주고 있다.

이현남 <전남대 미술이론 박사수료>

운 좋았던 터너처럼 이른 성공은 대부분 불우한 후반을 가지고 오게 마련이지만, 일생에 걸친 그의 절제력 있는 생활은 그에게 어두운 노후를 선물하지 않았다. 결혼도 하지 않았을뿐더러 풍경 화가답게 전 유럽을 누빌 때도 혼자 여행하기를 즐겼고, 여행을 마치면 다시 칩거해 그림 그리기에만 열중했을 뿐이었다.

이렇게 오로지 작품에 매진했던 터너의 열정은 그를 누구나가 받고 싶어 하는 ‘터너상’의 영예에 걸맞는 영국 최고의 국민화가로,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화가로 자리매김하도록 만들었다.

가을이 어느새 성큼 다가왔다. 결실의 계절 가을, 독자 여러분들도 얼마 남지 않은 올 한해 이루고자 했던 만큼 결실을 얻을 수 있도록 마무리 잘하시길 바라며 미리 추석 인사를 전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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