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진군을 광주목으로 승격시키다 -
2018년은 ‘전라도’라는 이름을 정한 지 1000년이 되는 해였다. 전라도의 중심 도시인 전주와 나주, 광주에서는 전라도 정명(定名) 1000년을 기념하는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졌다. 그중 광주공원에는 조선시대 광주를 상징했던 희경루가 복원된다.

‘기쁘고 경사스럽다’는 의미를 담은 희경루(喜慶樓)는 1451년(문종 1), 무진군이 광주목으로 승격됐을 때 광주인들의 기쁨을 품고 있다. 광주목으로의 복귀 당시 광주인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는 신숙주와 심언광이 남긴 ‘희경루기’에 각각 “고을의 원로들이 모두 모여 경축했다”, “고을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고 서로 경축했다”라는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광주는 전라도의 큰 고을로 정3품 목사가 파견돼 다스렸던 고을이었다. 광주를 광주목이라고 불렀던 이유다. 그런데 1429년(세종 11), 만호를 지냈던 노흥준이 목사 신보안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보안이 노흥준의 기첩(妓妾, 기생 첩) 소매를 간통하자, 노흥준이 달려가 신보안의 옆구리와 무릎을 걷어찼던 것이다. 그리고 3달 후 신보안은 이질(痢疾)로 사망한다. 갑작스런 목사의 죽음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노흥준의 목사 구타 사건이 알려진다. 이에, 형조에서는 노흥준의 탄핵을 요구했고, 노흥준은 수령을 욕보였다는 죄로 장 100대를 맞고 변방의 군인으로 충원된다.

목사 신보안의 잘못이 먼저였지만, 읍민이 목사를 걷어찬 행위는 자식이 어버이를 걷어찬 행위와 같이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의 법도였다.

노흥준의 목사 구타 사건의 후유증은 노흥준에 멈추지 않았다. 형조는 “광주의 관호(官號)를 강등시키소서”라고 건의했고, 세종은 그렇게 하라고 승락한다. 광주목이 무진군으로 강등된 것이다.

무진군으로 강등된 광주가 다시 광주목으로 복귀된 해가 1451년(문종 원년)이다. 광주목으로의 복귀에는 광주인들의 노력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본군(광주)의 유향 품관(留鄕品官, 지역의 유력자) 및 인리(人吏) 등도 또한 모두 상언(上言)”하자, 문종이 허락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지역의 유력자 중 대표적인 인물은 세종의 큰 사랑을 받았던 이선제였다.

이는 기대승이 남긴 ‘희경루기’의 “상(문종) 원년 신미(辛未, 1451) 여름에 고을 사람 이선제 등이 논의하여 이르기를, 고을의 부로(父老)와 아전을 거느리고 사실을 갖추어 적어 상소하니 상이 특명으로 옛 이름을 회복하여 광주목으로 하였다”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무진군이 광주목으로 승격되던 해인 1451년(문종 1), 광주 충장우체국 자리에 새로운 공북루가 완성된다. 광주의 부로 등은 광주 목사에게 광주목으로의 복귀를 기념하기 위해 ‘루’의 이름을 ‘기쁘고 경사스럽다’는 뜻을 지닌 희경루로 바꾸자고 청한다. 공북루가 희경루로 이름을 바꾼 연유다.


- 세종의 사랑을 독차지하다 -
무진군을 광주목으로 승격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분이 광주의 도로명 ‘필문대로’의 주인공 필문 이선제다.

이선제(李先齊, 1390-1453)는 1390년(공양왕 2) 광주광역시 남구 이장동에서 이일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이일영은 ‘광주읍지’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선제의 묘지에는 ‘중직대부 사복경을 지냈다’고 나온다. 필문은 이선제의 호다.

양촌 권근의 문하에서 수학한 후 1411년(태종 13) 사마시에 합격하고, 1419년(세종 1년) 문과에 급제한다.

이선제의 30년 관직 생활은 활동의 내용에 따라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1419년(세종 1) 급제 후부터 세자인 문종이 섭정을 시작하는 1442년(세종 24)까지이고, 제2기는 문종이 섭정을 시작한 후부터 관직을 끝마칠 때까지이다.

제1기는 집현전에서 활동했던 시기였다. 이선제의 집현전에서의 활동 기간은 20여 년이나 된다. 20여 년 동안 필문은 집현전 수찬, 집현전 부교리를 거쳐 종3품직인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다. 집현전에서만 20여 년 근무는 세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제1기가 학자로서의 활동기였다면, 제2기는 정치적 활동기였다. 1442년(세종 24) 이후 세종은 각종 질환으로 모든 정사를 세자인 문종에게 맡겼다. 이후 세종은 8년여 동안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모든 서무를 위임하였으며, 섭정에 필요한 첨사원을 설치하였다. 8년여의 섭정을 끝내고 문종이 왕으로 등극했으나, 3년도 채 채우지 못하고 39세의 나이로 병사한다.

이 시기 이선제는 6조의 고급관료인 참의나 참판으로서, 그리고 외관직인 강원도 관찰사로의 직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관직 생활에서 직접 체험한 경험과, 집현전 재직 당시 살펴본 옛 제도를 바탕으로 각종 정책 상서를 올리는 등 활발한 정치적 활동을 한다. 당시 이선제가 올렸던 정책 상서(上書)로는 ‘이재소’를 비롯해 ‘군재소’, ‘단군신전건립소’, ‘시의소’ 등이 있다. 이 상서들은 당시 이선제가 경제, 국방, 의료 및 단군에 대해 어떤 생각과 의견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시기 필문 이선제의 관직 중 눈에 띄는 것이 1442년(세종 24) 첨사원동첨사와 문종 즉위년(1450)의 세자우부빈객이다.

첨사원동첨사는 문종이 세자 시절 섭정할 수 있도록 설치한 첨사원의 관직이며, 문종 즉위년의 세자우부빈객은 다음 임금이 되는 단종을 보필하는 관직이었다. 당시 이선제를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의 첨사원 관직의 독점은, 집현전 출신 학자들이 학문적 집단에서 정치 세력화하는 계기가 된다.

필문 이선제의 죽음은 다소 갑작스럽다. 돌아가기 바로 전 해까지 시의소 및 단군 신전 건립소를 올리고 있었고, 심지어는 중국 사신을 호송하는 반송사로 임명되고 있었다.

1452년(단종 즉위년)에 올린 상소에 ‘천식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어, 천식을 앓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집현전 학자들의 정치 세력화로 인한 수양대군 측과의 정치적 갈등이 그의 죽음을 앞당긴 한 요인은 아니었을까 싶다. 30여 년 동안 주요 관직에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실록에 그의 졸기마저 남아 있지 않고 있음도, 그의 정치적 박해를 짐작케 해주는 요인으로 생각된다.


- 일본에 반출된 묘지, 반환되다 -
집현전에서만 20여 년을 근무했고, 종2품직인 강원도 관찰사 및 예문관 제학 등 고위 관직을 지냈지만, 최근까지도 그의 생몰연대조차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그가 역사에서 잊힌 이유는 그의 5대손인 이발과 이길, 이급이 1589년(선조 22) 일어난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돼 죽임을 당하면서, 가문이 역적으로 몰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극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묘지(墓誌)가 1998년 5월 김해공항을 통해 밀반출이 시도될 당시 양맹준 감정관이 두 장의 그림으로 남겼기 때문이었다.

‘묘지’는 망자의 행적을 돌이나 관에 새겨 무덤에 넣어놓는 글을 말한다. 이선제 묘지는 높이 28.7㎝, 폭 25.4㎝ 크기로, 상감 기법으로 만들어진 분청사기에 새겨져 있었다. 묘지의 앞면과 뒷면, 측면에 이선제의 생몰연대 등을 포함한 삶과 가족에 대해 말해주는 명문(銘文) 248자가 새겨져 있다.

김해공항 문화재 감정실에서 근무하던 양맹준은 유물의 가치를 알아보고 반출을 불허한 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이선제 묘지를 두 장의 그림으로 남긴다. 그런데 묘지는 한 달 뒤인 6월, 김포공항을 통해 통관절차를 생략한 채 일본으로 끝내 밀반출된다.

문화재 밀매단이 세관 공무원을 매수했던 것이다. 당시 검찰의 공소장을 보면, 묘지는 일본으로 반출된 직후 일본인 골동품상에 500만 엔에 팔린 것으로 나온다. 그 뒤 묘지는 종적을 감춘다.

일본에서 반환된 이선제 묘지

2014년, 이선제 묘지를 일본에서 극적으로 확인한 국외소재 문화유산재단은 소장자를 만나 “묘지는 일반적인 고미술품이 아닙니다. 조상을 숭배하는 한국인들에게는 조상의 분신과 같습니다. 조상을 잃고 상심하는 후손들을 인도적으로 배려해 주십시오”라고 설득했고, 2017년 일본인 소장자 도도로키 구니에 여사는 이선제 묘지를 한국에 되돌려준다. 이 이야기를 정리한 책이 ‘이선제 묘지 귀향 이야기’이다.

묘지는 ‘분청사기 상감 경태 5년 명 이선제 묘지’란 명칭으로 보물 1993호로 지정됐고,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 왕버들 나무를 심다 -
임진왜란 의병장 고경명 장군을 모신 사당 포충사 옆에 난 논길을 따라 가면 나타나는 마을이 필문 이선제가 태어나고 자란 원산동이다. 이곳에는 그의 신주를 모신 ‘부조묘’가 있고, 뒷산 언덕에 그의 무덤이 있다.

이선제 부조묘 전경(광주시 남구 원산동)

마을 입구에는 이선제가 가문의 번영을 희구하면서 심은 왕버들 나무가 있다. 이선제는 나무를 심으면서 “이 나무가 죽으면 가문이 쇠락할 것이니, 관리를 잘하라”고 특별히 당부했다고 한다. 이후 이선제의 후손들은 과거에 급제하면, 이 나무에 급제자의 이름과 북을 걸어놓고 두드리면서 잔치를 벌였다. 그래서 이 왕버들 나무의 이름이 ‘괘고정수’(掛敲亭樹)다.

‘괘고정수’

이선제를 필두로 그의 두 아들인 이시원과 이형원이 과거에 합격했고 이형원의 아들 이달선, 이달선의 아들 이공인, 이공인의 아들 이중호, 이중호의 아들 이발과 이길이 대를 이어 합격하면서 가문의 영광을 알리는 북소리가 연이어 울린다.

필자가 최근 방문했을 때 광산이씨의 자제분이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는 플래카드가 왕버들 나무에 걸려 있었다. 현대판 괘고정수인 셈이다.

“이 나무가 죽으면 가문이 쇠락할 것”이라는 이선제의 예견대로 5대손인 이발이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돼 멸문의 화를 당하자, 괘고정수도 말라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발의 억울함이 밝혀지고 복권된 이후 다시 잎이 피어 살아났다고 한다.

이선제 등을 모신 수암서원(강진군 성전면)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한동안 잊힌 인물인 필문 이선제, 오늘 그는 남도에서 희경루 복원과 묘지 반환으로 다시 화려하게 부활했다. 조선대에서 교육대를 잇는 도로는 이선제를 기리는 ‘필문대로’가 됐고, 강진군 성전면 수양리의 ‘수암서원’과 화순군 앵남리의 ‘오현당’에도 배향된다.

그가 태어난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에는 그의 부조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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