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옥 아동문학가·교육학박사

연말의 거리는 유난히 조용하다. 그러나 이 잔잔함의 표면 아래에는 여전히 서로를 끝없이 연결하고, 모든 것을 계산하려는 시대의 박동이 흐르고 있다. 생각과 감정까지 데이터의 흔적처럼 남겨지는 지금,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엇을 잃지 않아야 하는가? 기술은 우리의 하루를 단축하고 손끝의 한계를 넘어서는 힘을 주었지만, 그 편리함은 때때로 마음의 결을 희미하게 만든다. 속도가 미덕이 된 사회일수록, 내면을 지키려는 노력은 더욱 절실하다.

AI는 방대한 정보를 빠르게 읽고, 패턴을 찾아내지만, 표정의 흔들림과 침묵의 온도는 감지하지 못한다. 말보다 먼저 흐르는 기척, 설명되지 않는 마음의 결은 인간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세계의 깊이다. 이 감각이 무뎌지는 순간, 삶은 단순한 데이터의 흐름으로 축소될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생각을 멈춘 순간, 인간은 타인의 성찰이 정한 길로 흘러가게 된다”고 말했다. 기계가 판단을 대신하는 시대일수록, 스스로 묻고 헤아리는 능력은 마지막 자존이 된다.

기술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다. 어떤 기능이 인간보다 빠르고 정확하더라도, 인간의 존재를 대체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 시대는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고유한 가치 감정의 깊이, 이해의 폭, 타인을 향한 배려의 결 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누군가의 고통을 감지하는 섬세한 감성, 말없이 전해지는 위로의 온기, 서로를 바라보며 쌓아가는 신뢰는 어떤 알고리즘도 흉내만 낼 뿐 재현하지 못한다. 바슐라르는 “인간의 영혼은 설명보다 상상에서 더 크게 자란다”고 했다. 또한 마르쿠제는 “자유는 단순한 권리가 아니라 성찰 속에서 꽃피운다”고 말했다. 상상과 성찰이 사라진 자리에 기술만 남는다면, 인간의 세계는 구조만 남고 숨결은 사라진다.

소크라테스는 “성찰 없는 삶은 공허하다”고 했다. 기술이 거의 모든 것을 대신 설명하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 조용히 자기 마음을 돌보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관계의 여백을 잃어가고 있다. 느림 속에서 자라는 신뢰, 기다림이 길러내는 감정의 깊이, 마주 앉아 나누는 호흡의 리듬은 화면의 편리함으로 대체할 수 없다. 여백이 사라진 관계는 건조해지고, 그 건조함은 결국 인간성의 균열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선택의 순간마다 인간다운 결정을 내리는 일은 여전히 우리에게 맡겨져 있다.

니체는 “인간은 자신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성장한다”고 말했다. 우리의 시선이 오로지 효율과 빠름에만 머문다면, 마음의 지형은 점점 단순해질 것이다. 그러나 성찰을 잃지 않는다면, 기술은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라 삶을 넓게 비추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연말의 바람은 우리에게 묻는다. 이 거센 변화의 흐름 속에서, 당신은 무엇을 지키고 싶은가. 기술의 파도 속에서도 인간다움의 등불을 끄지 않으려는 작은 의지야말로, 우리의 시간을 지탱해온 가장 오래된 힘이다.

우리가 기술을 경계하는 이유는 그것이 낯설어서가 아니다. 편리함 속에서 우리의 감각이 무뎌지고, 마음의 유산이 빛바래는 순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세계를 헤아리는 시선, 작은 존중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 말과 말 사이를 지탱하는 조용한 배려는 인간이 오래 지켜온 품격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의해 형성된다.” AI 시대의 질문은 기술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인간으로 남고자 하는가이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되, 마음의 방향을 잃지 않는 의지, 타인을 향해 내미는 조용한 이해, 그리고 삶을 따뜻하게 지키려는 결심 이 세 가지가 우리를 단순한 사용자가 아니라 인간다움의 주체로 세울 것이다. AI의 파도 속에서도 이 등불을 꺼뜨리지 않는 일, 그것이 오늘 우리가 감당해야 할 가장 단단하고 품격 있는 사명이다. 우리의 선택과 성찰이 결국, 인간의 미래를 밝히는 가장 오래된 빛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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