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기 전남도립대 웰니스학과·문학평론가

유독 그리운 게 많아진 연말이다. 어떤 건 이미 사라졌고, 어떤 건 지금도 눈앞에서 조용히 흩어진다. 이상한 일이다.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소중했다는 사실을 깨달으니 말이다. 우리는 늘 새것을 향해 움직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오래된 것들이 남긴 온기가 가장 오래 머문다. 그리움은 그래서 지금보다 과거가 더 아름다웠다는 뜻이 아니라, 한때 우리를 지탱해준 시간이 있었다는 증거에 가깝다.

생각해보면, 그리움은 사라짐의 뒤편에 남는 잔향 같은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무언가가 사라지는 순간을 제대로 바라볼 틈조차 갖지 못한다. 변화가 너무 빨라서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흘려보내야 하는지 판단할 여유가 없다. 속도가 삶의 기준이 되고, 효율이 인간관계의 조건이 되면서 예전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시간의 감각들이 하나둘 자리를 잃는다. 느리게 걷는 습관, 한 사람을 오래 바라보는 마음, 관계가 깊어질 때까지 버티는 인내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운 것이 사라지는 까닭은, 아마도 우리가 그것들을 붙잡아야 할 타이밍을 놓쳐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기다림이 삶의 일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고, 그 사이의 시간까지도 관계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지금의 시간은 모든 것을 ‘즉시’ 해결할 것을 요구한다. 답변이 조금만 늦어도 불안하고, 마음을 정리할 틈도 없이 새로운 관계와 일들이 밀려온다. 이렇게 빠른 속도에서는 깊은 감정이나 오래된 정이 자리를 잡기 어렵다. 그리움의 대상들은 대부분 느린 시간 속에서 자란 것들이다.

요즘의 관계는 오래 머물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에게 머무르려면, 서로를 알아가려는 의지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의 관계는 상황의 흐름에 맞춰 연결되고, 각자의 사정에 따라 쉽게 흩어진다. 억지로 잡아둘 수는 없지만, 관계가 가볍게 스칠수록 그리움이 남을 여지도 줄어든다. 오래된 친구가 유난히 그립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관계 안에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감정의 쓰임도 달라졌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뉴스와 SNS를 통해 자극적인 정보를 접한다. 기쁜 일도, 화날 일도, 슬픈 일도 빠르게 지나가 버린다. 감정이 깊어질 틈이 없고, 깊어진 감정이 기억되기 전에 다른 사건들이 덮어버린다. 감정이 얕아지면 기억도 얕아지고, 얕아진 기억은 금세 지워진다. 그리움은 결국 기억의 또 다른 이름인데, 기억을 천천히 쌓을 환경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운 것들이 사라지는 시대라 해도, 그리움 자체가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소중하다. 그리움은 잃어버린 것의 목록을 적는 일이 아니라, 앞으로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묻는 과정이다.

과거가 그리운 이유는 그 시절이 특별해서가 아니다. 그때의 나를 지탱해주던 무언가가 지금의 삶에서 희미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대상은 사실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잃어버린 감정의 방식이며, 한때 가졌던 삶의 태도다.

그러므로 연말이 주는 그리움은 슬픈 감정만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인지 확인하는 순간이다. 이미 사라진 것에 매달릴 필요는 없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들을 조금 더 귀하게 다루는 일은 가능하다. 서로에게 시간을 조금 더 쓰고, 관계를 쉽게 단정 짓지 않고, 감정을 깊이 사용하는 것.

그런 태도들이 쌓이면, 내년 이맘때 우리가 떠올릴 그리움은 지금보다 더 따뜻한 기억이 돼 있을 것이다. 사라짐은 피할 수 없지만, 어떤 형태의 그리움을 남길지는 결국 우리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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