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분단의 상징인 경의선 도라산역에 신영복의 글씨로 새겨진 박봉우의 대표작 ‘휴전선’시비.

박봉우는 ‘휴전선의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평가는 분단 문제나 통일 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이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임을 말해 준다. 당시 냉전 이데올로기의 대립 상황 속에서도 한쪽 이데올로기에 편향되지 않고, 분단 문제를 고도의 시적 감각으로 형상화해 낸 박봉우의 이러한 선지자적 인식은, 당시로선 그리고 지금의 평가에 있어서도 매우 독특한 것이다.

말년의 박봉우 시인.

박봉우(朴鳳宇, 1934~1990)는 전남 순천시 외서면 금성리 679번지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전남 승주군수를 지낸 아버지 박영모는 그가 태중(胎中)에 있을 때 세상을 떴다. 유복자로 태어난 그였던 만큼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그의 시편과 글 곳곳에 애절하게 담겨져 있다. 유년을 승주에서 보낸 그는 광주로 이사해 광주서중에 입학했다. 이때 박성룡, 윤삼하, 김중배, 민두기 등과 ‘진달래’동인을 결성하여 의욕적으로 활동을 펼쳤다. 이들의 인연은 1950년대 광주문학의 핵심에 있었던 ‘영도(零度)’ 동인으로 이어진다. 중학교 2학년 때 한국전쟁을 겪은 박봉우는 1955년 광주고를 거쳐 전남대 정치학과 2학년 때인 1956년 박봉자라는 이름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휴전선’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분단문학의 정수로 평가받는 시 ‘휴전선’으로 박봉우는 우리문단에 곧게 섰고, 이어진 수많은 작품들에 혁명과 사랑·자유·통일에의 그리움과 의지를 응집시켜 놓았다.

박봉우가 광주를 떠나 서울로 간 것은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직후이다. 전남일보(현 광주일보 전신) 서울 주재기자로 재직하며 생계를 꾸렸던 그는 이 무렵 명동거리의 ‘은성’, ‘돌체’, ‘르네상스’등을 누비며 천상병, 김관식, 신동엽 등 많은 문인들과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박봉우는 주재기자로 재직하던 중에 영문도 모른 채 집단폭행을 당한 후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그의 정신 상태는 정상과 비정상을 반복하였고, 급기야 정신병동에 감금되는 사태를 맞았다.

시극(詩劇) 운동을 위해 조직한 ‘네오 드라마’창립식을 마치고 동인들과.

‘천재의 질병’으로 알려진 정신 이상은 그의 시재를 조로화 시켰다. 그는 “경무대는 이제 시인들이 모여서 의논하는 시인들의 공원이 되어야 한다”라거나 “노벨문학상은 그리고 노벨평화상은 내가 탄다”면서 거침없이 울분을 토하고 정견을 발표하던 그는 전쟁의 참극이 진정될 무렵에 발생한 4월 혁명에 의해 한국의 민주주의가 완성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소망과 달리, 군사정변에 의해 혁명이 전복되어버리자 그는 극심한 절망에 사로잡혔다. 이때 그는 ‘창작과 비평’(1975)에 ‘서울 下野式’을 발표하고 전북 전주로 내려왔다.

박봉우와 전주와의 인연은, 전주시장으로 있던 고교 동창이 그의 사정을 딱히 여겨 전주시립도서관 촉탁사원 자리를 제공한 데에서 비롯됐다.

전주는 삶에 지친 박봉우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안겨주었다. 또한 그는 전주 사람들의 배려에 힘입어 불성실한 근무와 숱한 이석에도 불구하고 직장으로부터 퇴출되지 않았고, 유명한 남부시장에서 술과 함께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비록 경제적으로 풍족한 살림은 아니었으나, 전주에서 보낸 한 철이 박봉우에겐 정신적 안정을 취할 수 있었던 호시절이었던 셈이다.

남북의 선로가 단절된 경의선 도라산역.

그러나 시대에 대한 울분과 격정을 삵이지 못하고 토해내던 그의 좌절은 끝내 정신병을 더욱 깊게 만들었고, 그로인한 그의 말년은 암울했다. 포장마차의 장사꾼으로 나서야했던 아내마저 유방암으로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그는 슬픔과 쓸쓸함, 알코올중독으로 오랫동안 자신을 잃고 방황했다.

1990년 3월 시인의 죽음이 전해졌을 때 많은 문우들은 마치 예고된 상황처럼 담담한 슬픔으로 그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시인의 오랜 기인적 생활에 그를 둘러싼 이들이 지쳐버린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어두웠던 시인의 말년이 ‘시인 박봉우’에 대한 희망을 앗아갔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의 상흔과 폐허의 1950년대부터 민주화 열기가 분출됐던 1980년대까지 분단민족의 참담한 현실에 스스로를 옥죄며 살아왔던 박봉우는 울분과 격정으로 뜨거워진 피를 불같은 시로 토해냈다. “내 몸이 갈라질 바에야 내 마음이 갈라질 바에야 내 정신 흔들릴 바에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며 “갈라진 황토 흙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는다는 말인가”라고 절규하던 시인은 ‘이 커다란 아픔을 견디며 돋아난 풀잎들, 쏟아지는 양지’를 꿈꾸며 고난에 찬 생의 문을 닫은 것이다.

평생 가난을 달고 살았던 그였지만, 시작의 열정은 전신에 흘러넘쳤던 시인 박봉우. 착란 중에도 “국회의사당은 이제 시인들이 다스릴 곳”이라던 그는 지금 어느 하늘가에서 누구와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까….




등단작 읽기

휴전선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火山)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姿勢)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高句麗) 같은 정신도 신라(新羅)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意味)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流血)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廣場).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休息)인가, 야위어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 같은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어야 하는가. 아무런 죄(罪)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火山)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姿勢)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조선일보, 1956. 1. 1>


박봉우의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휴전선’이다. 이 시는 6·25의 참상과 휴전, 분단의 비극적 상황을 실감나게 고발한 작품이다.

당시 시인들이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문제에 천착하거나 현실과 유리된 자연이나 내면세계를 노래할 때, 박봉우는 분단 극복 문학 또는 통일문학의 가능성을 선구적으로 보여줬다.



김광섭은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고 나서 다음과 같이 심사평을 썼다.

“‘휴전선’을 일석(一席)으로 택한 것은 시상과 표현이 바로 깨어 있은 까닭이다. …(중략) … 이 시는 휴전선의 위치에 서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느낌을 가지게 하고 새로운 의미를 열어보기 위하여 새로운 형성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시대적인 억압을 뛰어넘으려는 시인의 용기와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미래를 선취한 시인의 자유롭고 활달한 상상력이다. 따라서 이 시의 생명력은 바로 현재적 가치를 그대로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 연재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시문학파기념관장·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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