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전집 출간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제자들에 둘러싸여 축하 케이크를 자르고 있는 최하림 시인 부부. (2010. 2. 18)

최하림의 시는 목포라는 공간에서 시작한다. 그의 초기 시들이 가진 어두운 색채는 모두 목포가 만들어낸 이미지다. 그의 시는 마치 절간처럼 고요한 풍경, 그러나 고요의 이면 속에서는 수런거리는 소리들이 연쇄 반응을 일으킨다. 고요의 풍경 뒤에 숨어 있는 또 다른 풍경, 세상은 사실 눈으로 보이는 풍경의 이면 속에 실체를 숨기고 있다. 그 실체에 대한 접근이 최하림의 시였다.

최하림(본명 최호남)은 1939년 3월 7일 신안군 안좌면 원산리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최하림의 어릴 적 꿈은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으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가산이 기울면서 의식의 변화가 일었다. 고아와 다름없다는 의식과 아버지에 대한 원죄의식은 최하림이 유년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내고 나서도 좀처럼 떨쳐버릴 수 없는 원체험으로 자리한다.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수업료를 내지 못하던 학창시절 최하림은 학교에 갈 수 없어 목포의 해안통 거리를 헤매는 날이 많았다. 굶주림으로 육체는 피곤해지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신의 내면으로만 파고들던 어느 날 문득 시가 최하림에게 찾아온다. 분명하지 않은 생각들로 선창가를 배회하던 그에게 수평선을 배경으로 솟아오른 배의 돛이 선명하고 날카로운 이미지로 다가온 것이다.

신문 배달을 하면서도 책읽기를 즐기던 목포고 재학 시절 원동성, 김병곤, 김중식, 윤종석, 정일진 등과의 교우 관계는 그가 예술의 세계로 빠져드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평론가 김현과의 만남과 우정이 바탕이 되어 우리 문단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신선한 세대론적 신진대사를 이루었다고 평가되는 ‘산문시대’가 태어나게 된다. 최하림, 김 현, 김승옥 세 사람이 시작하여 1962년에 발간된 첫 동인지 ‘산문시대’는 김치수, 곽광수, 염무웅, 김상일, 강호무 등의 참여로 1966년까지 5집을 발행하기에 이른다.

이 무렵 최하림은 본격적으로 문학에 몰입하게 된다. 1960년부터 신춘문예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시고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빈약한 올페의 회상’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한다. 그러나 1966년 삼성출판사에 입사한 후 한동안 시를 접고 미술과 역사에 몰두했고, 이를 통해 민중적 삶과 언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최하림 시인의 생애 마지막 모습.(2010. 3)

그 후 최하림은 1984년부터는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서 시 창작론 강의를 시작했다. 1988년 대학 강의를 접고 전남일보사로 직장을 옮겨 광주에서 생활하게 된다. 1999년 지병으로 신문사를 그만둔 뒤 2002년부터 경기도 양평으로 거처를 옮겨 요양 중에도 그는 창작의 끈을 놓지 않았다.

최하림의 시는 1991년 발표된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를 계기로 의미 있는 변화를 보여준다. 고통스러운 현실과 그에 대한 심회, 그리고 대속을 고민하던 윤리적 목소리는 이제 가시적 세계와 비가시적 세계에 대한 사유를 통해 보다 근원적 층위의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진화한다.

‘굴참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온다’에서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에 이르기까지 그는 주의의 풍경과 사물들 그리고 그에 연루된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고, 이를 투명하고 경제적인 언어를 통해 군더더기 없이 묘사해 보인다.

그러나 그의 풍경과 사물 그리고 사람에 대한 관찰과 묘사는 원본을 모방하고 재현하는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시적 현상의 이면에 놓인 관계를 들여다보고 이를 시 언어가 증언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형식으로 구현하였다. 역사와 현실에 대한 관심과 시 언어의 형식에 대한 고민은 그의 마지막 시집에 이르기까지 동행했던 것이다.

시의 형식을 통해 풍경 뒤의 이면을 보여줬던 시인 최하림. 그러나 그는 끝내 간암을 이겨내지 못하고 2010년 4월 22일 오전 11시 20분 일흔 한 살의 나이로 연분홍빛 봄 햇살을 받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최하림은 시를 통해 세상의 균형을 잡았고, 전 생애에 걸쳐 순수와 참여 사이의 거리를 좁혀 나간 그런 시인이었다. 광주는 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다.

신안군 하의도 농민운동기념관에 세워진 ‘삼백 삼십 삼년 뒤에 부르는 노래’ 시비.

등단작 읽기
빈약(貧弱)한 올페의 회상(回想)



나무들이 일전(日前)의 폭풍처럼 흔들리고 있다



먼 들을 횡단하여 나의 정신(精神)은 부재(不在)의 손을 버리고

쌓여진 날이 비애처럼 젖어드는 쓰디쓴 이해(理解)의 속

퇴각하는 계단의 광선이 거울을 통과하며 시간을 부르며

바다의 각선(脚線) 아래로 빠져나가는

오늘도 외로운 발단(發端)인 우리



…<중략>…



나무가 물속처럼 커 오르고

푸르디푸른 벽에 감금한 꽃잎은 져내려

분홍빛 몸을 감싸고

직모물의 무늬같이 부동(不動)으로 흐르는

기나긴 철주(鐵柱)를 빠져나와 우리들은 모두 떠오른다



여인숙(旅人宿)에서처럼 낯설게 임종한,

그 다음에 물이 흐르는 육체 (肉體)여

아득히 다가와 주고받으며 멀어져가는 비극의 시간은

서산(西山)에 희고 긴 비단을 입고 오고 있다



아주 장대하고 단순한 바다 위에서

아아 유리디체여!

(유리디체여 달빛이 흐르는 철판 위

인간(人間)의 땀이 어룽져 있는 건물 밖에는

달이 떠 있고 달빛이 기어들어와

파도소리를 내는 철판 위

빛 낡은 감탄사를 손에 들고 어두운

얼굴의 목이 달을 보면서 서 있다)

<조선일보, 1964. 1. 1>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작 최하림의 시 ‘빈약한 올페의 회상’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먼 들을 횡단하여 나의 정신은 부재’에 대한 절규를 통해 ‘퇴각하는 계단의 광선이 거울을 통과’해 버리는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는 세상의 경계 위에 서 있다. 어느 한 곳에 발을 담그거나 치우치지 않고 아슬아슬한 긴장을 유지한다. “명백하게 구획을 나누고 어느 한쪽만을 선택하고 싶지 않다.”는 시인의 고백처럼 그것은 개인적 성향에 닿아 있으면서 또한 보편적 ‘균형’을 견지하고 있다.

최하림의 시는 역사와 현실에 대한 진지한 사색과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압축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무엇보다 청교도적 윤리의식과 지사적 기개를 바탕에 깔고 있는 그의 시는 넋을 잃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한 삶의 의미를 각인시켜주고 있다.

특히 이 시는 역사와 현실에 대한 진지한 천착과 자기존재, 나아가 존재 일반에 대한 깊은 성찰에까지 닿아있어 사유의 폭과 깊이를 확보하고 있다.


/시문학파기념관장·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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