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空(서공) / 어우당 유몽인
장욱 장지 한번가고 태어나지 않고
용사비 필세라도 그 누가 놀라리오
허공에 휘호 쓰노라면 글자마다 또렷하리.
張旭張芝不復生 龍蛇起陸也誰驚
장욱장지부복생 용사기륙야수경
閒將如意書空遍 一紙靑天字字明
한장여의서공편 일지청천자자명

연습지가 충분하지 못했던 시절에 손가락이나 붓을 들고 허공에 글씨를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바둑을 두고 난 후 잠자리에 들면 천장이 온통 바둑판으로 보였던 경험도 있으리라. 정신일도하사불성이라고 했다. 붓글씨의 멋에 푹 빠지다 보면 하늘과 천장이 온통 화선지로 보여 연습 삼아 글씨를 썼던 경험도 있다. ‘장욱과 장지 같은 큰 서예가가 다시는 안 나오니, 꿈틀대는 글씨라도 가히 놀랄 이 그 누구인가’라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푸른 하늘 한 종이에 글자마다 가득 빛나겠구나’(書空)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1559-1623)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 또는 외교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전서, 예서, 해서, 초서에 모두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저서로 최초의 야담집인 ‘어우야담’과 시문집 ‘어우집’이 있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장욱과 장지 같은 큰 서예가 다시는 안 나오니 / 꿈틀대는 글씨라도 가히 놀랄 이 그 누구랴! // 때로는 장차 마음대로 허공 가득 써 갈기니 / 푸른 하늘 한 종이에 글자마다 가득 빛나겠구나’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허공에 쓴 글자’로 번역된다. 장욱과 장지는 당나라의 유명한 서예가다. 그들은 용과 뱀이 꿈틀대는 듯한 초서에 능했다. 이제는 누구도 그런 펄펄 나는 글씨를 쓰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시인은 때로 무료할 때면 푸른 하늘 넓은 종이 위에 마음껏 글씨를 휘둘러 쓴다. 온 팔을 꿈틀대며 신나게 글씨를 쓰고 나면 푸른 천공위에 붙박이처럼 글자들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시인은 이처럼 커다란 시상 덩어리를 가슴에 품고 보따리 시상을 내뱉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중국의 대서예가였던 장욱과 장지 같은 큰 서예가가 다시는 안 나올 것이니 꿈틀대는 글씨라도 가히 놀랄 이 그 누구인가 라고 했다. 내 뱃속에 품은 마음을 커다란 붓 한 자루를 들고 이렇듯이 푸른 하늘에 내걸고 싶다 심회를 썼다.

화자는 경치 구에서 중국의 큰 서예가를 거명하더니만 정구(情句)에서는 당대의 대서예가답게 자신의 속 깊은 심회를 담아내고 싶었다. ‘때로는 장차 마음대로 허공 가득 써 갈겨볼 것이니, 푸른 하늘 한 종이에 가득 글자마다 빛나는구나’라고 했다. 중국의 대서예인이 없을 지니 당대의 서성(書聖)답게 써 보리라 했다.

※한자와 어구

張旭: 중국 당대의 큰 서예가. 張芝: 중국 당대의 서예가. 不復生: 다시 살아오지 않다. 龍蛇: 용과 뱀. 곧 꿈틀거려 글씨를 쓰다. 起陸: 땅으로 일어서다. 也誰驚: 누가 놀라겠는가. // 閒將: 때로는 장차. 如意: 마음대로. 書空遍: 허공에 두루 쓰다. 一紙: 한 종이. 靑天: 푸른 하늘. 字字明: 글자마다 분명하다. <시조시인·문학평론가(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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