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宮怨(춘궁원) / 지봉 이수광

궁궐에 맑은 봄 날 낮 시계는 가고
짝을 지은 여인네 아름다움 다투는데
지는 꽃 동풍 바람에 돌아가지 못하네.
禁苑春晴晝漏稀 閒隨女伴鬪芳菲
금원춘청주루희 한수여반투방비
落花也被東風誤 飛入宮墻更不歸
락화야피동풍오 비입궁장갱불귀

궁궐 속사정을 모른 여인들은 궁궐 생활을 부러워했다. 농촌에서 일만하는 농부와 그 자제들은 일도 하지 않고 고운 옷을 입고 궁궐 후원을 배회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그들의 하루 생활을 알고 나면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험난한 생활이다. 임금의 눈에 들어 하룻저녁이라도 성은을 입었다면 모르지만. 궁궐에 봄 날씨 맑고 낮 시계는 드문드문 가는데, 짝지은 여인들 한가로이 서로 따르며 아름다움을 다툰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궁궐 담장 안으로 날아들어 다시 돌아가지 못하네’(春宮怨)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지봉(芝峯) 이수광(1563-1628)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재등용 돼 도승지, 대사간을 지냈던 인물이다. 이해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인조를 공주로 모셨으며, 1627년 정묘호란에는 인조를 강화도로 모시면서 이조 판서를 지냈던 것으로 일려진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궁궐에 봄 날씨 맑고 낮시계는 드문드문 가는데 / 짝지은 여인들 한가로이 서로 따르며 아름다움 다투네 // 지는 꽃이 동풍을 잘못 만나서 / 궁궐 담장 안으로 날아들어 다시 돌아가지 못하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봄 궁궐 원망소리를 들으며’로 번역된다. 흔히 궁궐은 지옥과 같다는 말을 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것이 지당한 이치다. 그런데 궁녀는 누구를 위해 살고 누구를 사랑하며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적절한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백제 의자왕을 따랐던 삼천 궁녀의 사랑은 무엇이었던가. 엄히 물을 수 있다.


시인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상을 주무르고 있었음이 보인다. 궁궐에 봄 날씨는 맑고 화창하여 낮 시계는 드문드문 가는데, 짝을 지은 여인들 한가로이 따르며 아름다움을 다툰다고 했다. 궁녀들의 아름다움과 희망 없는 하루 생활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화자는 임금을 따르고, 중궁이나 후궁을 따르는 수많은 궁녀들의 삶에 대한 비판의식에 젖었던 나머지 시상은 넉넉해 보인다. 지는 꽃이 동풍이라는 지존의 섬김이란 올가미를 잘못 만나서, 한번 궁궐의 담장 안으로 날아 들어와 다시는 돌아가지 못한다고 했다. 인권도 자유도 희망도 없는 궁궐 담장 안의 춘궁들 원망이 담장을 넘어 엉엉 소리 내어 들리는 듯한 착각에 빠질 법하다.

※한자와 어구

禁苑: 궁궐. 春晴: 봄 날씨가 맑다. 晝漏: 낮 시계. 稀: 드물다. 閒: 한가롭다 隨女伴: 짝지은 여신들이 따르다. 鬪芳菲: 꽃다움(향기)을 다투다. // 落花: 궁녀의 비유. 也被: 입다. 만나다. 東風誤: 동풍을 잘못 만나다. 飛入: 날아서 들다. 宮墻: 궁궐 담장. 更不歸: 다시 돌아가지 못하다. <시조시인·문학평론가 (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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