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25(수) 20:52
|
이처럼 밤은 누군가에게 스며들거나 누군가를 스며들게 만든다. 유연하지 않으면 불가능할 이 스밈의 정서 속에서 우리가 사랑을 발견할 때 비로소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되고 또 받아들일 줄 아는 선한 마음이 싹틀지도 모른다.
하지만 건조한 사람은 밤의 물기와 밤의 애잔함과 밤의 속 깊은 속삭임을 모른 채 그저 눈을 감기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어느덧 오월이 다 가고 있다. 긴 언덕을 무거운 등짐을 지고 오르던 한 사내가 고개 정상에 이르러 가쁜 숨을 토해내는 듯하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과 스승의날과 5·18 행사 기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나니, 물건을 잔뜩 꺼내놓은 포대 자루처럼 몸과 마음이 허해서 멍해진다.
필자가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시인 문병란의 집’에서는 5·18 제44주년을 기념해 “시라는 무기로써 이 위기의 시대를 버틴다”는 타이틀로 5월 특별전(5월-8월)을 진행하고 있다. 5·18과 관련한 문병란의 시를 단순히 감상하는 차원을 넘어서 방문객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5월, 무등산의 별> 목판화를 제작, 비치했다. <5월, 무등산의 별>은 문병란의 시 「무등산」을 모티브로 해 창작한 작품인데, 이때 ‘별’은 애도이면서 희망을 상징한다.
방문객의 절반은 청소년과 청년들이다. 이들은 SNS에 능숙해 타 시·도에서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체험을 통한 목판화 작품은 개인이 소장하도록 하고 한지 여백에는 소중한 사람에게 보내는 자기만의 소원을 담은 짧은 한 문장을 새기도록 했다.
봄이 멀리 떠나고 소만(小滿)이 일주일 전에 물러났으니 이제 초여름이 시작되고 농촌은 차츰 일손이 바빠진다. 못자리의 물은 얌전하게 고였고 마른논에는 물이 넘실거린다. 더위를 피해 해가 서녘 산봉우리에 걸릴 때쯤에는 산책 겸 농로를 따라 무심히 걷는다. 걷다 보면 무논에 어린 주위의 모든 산들이 물속에서 고즈넉이 쉬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소쩍새가 먼저 운다. 남쪽 산에서 한 번 울면 서쪽 산에서 한 마리가 화답한다. 그렇게 서로 주고받으며 밤새 운다. 이 소리를 듣느라고 창문을 한 뼘쯤 열어둔 채 멍하니 천장 귀퉁이를 바라보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그래서 거실 침상에 손깍지 베개를 하고 드러눕는 평온함은 덤이다.
이윽고 밤이 무르익으면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혀야 할 때가 온다. 무논에 죽은 듯이 숨어 있던 수천 마리의 개구리 떼가 일시에 울기 시작한다. 저 멀리 그리고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이 왕성한 소리는 합창이 아니라 거의 절규에 가깝다. 마치 어느 시위 현장에서 울려오는 진혼곡 같기도 하고 무슨 행진곡 같기도 하다. 이 소리가 어두운 거실을 가득 메울 때쯤에는 소쩍새 울음소리가 막히고 혼미한 정신은 번쩍 트인다. 그리고 차차 밤하늘의 별들이 많아지고 이슬은 풀잎을 적시므로 조용히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마당 모퉁이 목련나무 아래로 가서 이슬을 맞으며 목을 뒤로 꺾은 채 동서남북 별자리를 헤아린다. 몸이 물방개처럼 돈다. 여름밤 별자리는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련해지고 회한에 젖게 만든다. 누군가 옆에 있다면 그와 함께 누워서 별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밤이다. 그래서 여름밤은 추억을 하나 만들고 싶을 만큼 아름답기만 하다. 그래서일까, 필자가 썼던 시 「여름밤」이 불현듯 떠올라 여기 옮겨 보기로 한다.
옛날은 없고 지금은 서럽지만 꽃 피는 마음을 난 안다// 떠나갈 사람과 누워서, 말없이 다정히 누워서 밤하늘을 본다// 속엣말도 이제 부질없는 질투가 될 것 같아 잊기로 한다// 그는 손가락으로 별자리를 그리고 난 그것이 그가 나를 달래려 하는 참모습임을 믿는다// 이슬이 내려 나의 눈엔 근심이 들고 그의 눈은 더 총총하다// 그가 가고 그가 누웠던 그 자리에 내가 누워서 아침을 맞는다// 여름밤은 이처럼 백치(白痴)가 되어도 좋다 (『길에서 만난 눈송이처럼』, 2023)
여름밤을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엽서를 보내고 싶어진다. 정치도 그랬으면 좋겠다.
▶ 디지털 뉴스 콘텐츠 이용규칙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