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소평도’ (종이에 담채·왼쪽)와 ‘소평도’ (쳇GPT 생성이미지’

한 획은 단순한 선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를 부르는 행위이고, 말해지지 않은 감정의 응결이다. 이 작업은 여수 장도의 섬 이름을 부르며 시작됐다.

오래전 누군가의 입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를 이름을 다시 부르는 순간, 섬은 조용히 깨어났다. 나는 그 깨어남의 감각을 한 획으로 남겼다. 바람처럼 지나간 호명의 숨결이 종이 위에 번졌고, 그 번짐은 나의 기억과 감정, 그리고 지나온 시간의 결을 따라 퍼져갔다.

‘파랑 소평도’(사진 왼쪽)는 그렇게 탄생한 회화다. 담채로 그린 이 작업은 종이 위에 스민 푸름을 통해 감정의 온도를 낮추고, 침잠된 내면을 응시하게 만든다.

중심의 짙은 남청은 감춰진 침묵이고, 그로부터 번지는 부드러운 농담의 전환은 삶 속 호흡의 결이다.

나는 이 작업을 하나의 ‘부름’이라 여긴다. 한 번의 손짓, 한 번의 숨, 그리고 한 번의 이름. 그 안에는 말하지 못한 기억이 있고, 조용히 쌓여 있던 감정이 있다.

최근, 이 획을 디지털로 다시 호출해 보았다. 이번에는 손이 아닌 픽셀의 떨림으로, 붓이 아닌 알고리즘으로. 생성형 AI와 협업한 ‘소평도’(사진 오른쪽)는 물리적 붓질이 사라진 대신, 감정의 진동이 더욱 입자처럼 떠오른다.

중심은 여전히 침묵을 품지만, 주변의 흐름은 증기처럼 부드럽게 사라지고 있다.

형태는 닮았으되 감각은 사뭇 다르다. 하나는 손의 온기에서 비롯된 살아 있는 떨림이고, 다른 하나는 AI가 상상한 표현의 실체이다. 하지만 둘 다 마음을 멈추게 한다. 둘 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존재의 파장을 담고 있다.

AI는 인간보다 더 정확하게 본다. 하지만 인간은 AI가 읽어내지 못하는 ‘의미’를 기억한다.

이 협업은 그 간극을 마주하고, 그 너머를 상상하는 일이었다. 회화는 여전히 살아 있다. 비록 그것이 더 이상 종이 위에만 머무르지 않더라도. 한 획은 여전히 호명의 힘을 지니고 있으며, 파랑은 그 부름의 색이다.

나는 여전히 부른다. 내 안의 침묵 속에서 조용한 흔들림을.<대인동에서 화가 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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