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 ‘나주 정미소 작은미술관’ 총괄 큐레이터

나주 원도심의 조용한 골목 어귀를 걷는다. 낡은 시멘트와 붉은 벽돌 건물이 반갑다며 인사를 건넨다. 한때 호남평야에서 걷어 올린 쌀의 무게와 농부들의 땀방울, 그리고 쉴 새 없이 돌아가던 기계 소리로 가득했었을 공간이다. 바로 나주 정미소다. 1920년대 초 지어져 거의 100년 세월을 견딘 건물이다. 단순히 쌀을 빻던 산업 시설이 아니다. 시대의 증인이자 역사의 현장이었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젊은 학생들이 모여 광주학생항일운동을 도모했던 역사적 장소였다. 나라 잃은 청춘들이 뜨거운 피를 용솟음치며 만났던 회합의 장소였더랬다. 벽엔 뽀얗게 먼지가 묻어있다. 어찌 물리적인 먼지만 있겠는가. 숱한 사연과 기개가 더 무겁게 내려앉아 있다.

오랜 세월 이 공간은 침묵했다. 정미소가 그 오랜 침묵을 깨고 깨어났다. 나주시 도시재생사업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나주 최초의 현대미술 전문 공간인 ‘나주 작은미술관’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문을 연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공간이 나주 지역에 던지는 울림의 크기는 결코 ‘작지 않다’고 확신한다. 대도시에 으리으리하게 자리 잡은 미술관들이 주는 위압감 대신, 이곳은 낡고 투박한 도시의 질감으로 관람객을 편안하게 맞아준다. 쌀을 도정했던 4동과 5동 건물은 이제 예술작품을 품어내는 전시장이 됐다. 기둥과 높은 천장에서는 오랜 역사를 품은 공간만이 줄 수 있는 ‘깊은’ 울림이 느껴진다.

큐레이터로 이 공간의 전시를 기획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지점이 있다. ‘정미소’(精米所)를 단순한 이름으로 두지 않고 ‘정(情)미(味)소(笑)’라는 세 가지 정서로 풀어내는 것이었다. 인정이 넘치고, 삶의 풍미가 담겨 있으며, 그 모든 것에 웃음을 더하는 공간. 이게 바로 나주 작은미술관이 지향하는 방향이다. 예술은 높은 곳에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가장 낮은 자리, 즉 쌀을 찧던 고단한 일상과 맞닿아 있을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이러한 비전을 이 공간에 풀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전문 큐레이터가 연계된 만큼 미술관의 전시 기획과 체계적인 프로세스를 통해 미술관의 질적 수준을 높이려 애썼다.

전시는 늘 지역민의 삶과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개관전이었던 ‘흔한 동네 풍경’이나 최근 진행한 ‘수줍은 고백, 평범한 날들의 특별한 이야기’ 같은 전시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나주 작은미술관의 주인공은 화려함보다는 지역에서 묵묵히 예술 활동을 이어가는 작가들, 그리고 그들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일상 속 특별함을 발견하는 지역 주민들을 모셨다.

미술관 개관 소식에 반색하며 “우리 동네에도 미술관이 생겼다”고 기뻐했던 주민들은 이곳의 존재 이유다. 그들은 더 이상 먼 곳까지 가지 않아도 집 앞에서 수준 높은 현대미술을 접하고, 때로는 예술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새로운 활력을 얻는다. 나주 정미소 작은미술관은 도시 재생의 모범 사례를 넘어, ‘미술관은 마땅히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가장 따뜻한 답변을 건네준다.

작은미술관은 이처럼 ‘지역을 잇는 플랫폼’이다. 쌀을 통해 생계를 잇던 정미소가 이제 예술을 통해 사람과 사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도시와 지역의 정서를 잇는 역할을 한다. ‘재생’이란 낡은 것을 새 것으로 바꾸는 재개발이 아니다. 그 안에 깃든 고유한 역사와 정신을 살려 새로운 시대의 언어를 입히는 일이 아닐까. 나주 작은미술관은 그같은 점을 매일같이 증명해 보이고 있다.

쌀을 찧던 기계는 멈추었지만, 이곳에서는 매일 새로운 영감과 이야기가 빻아지고, 예술의 쌀이 빚어지고 있다. 큐레이터로서 이 작은 공간이 나주를 넘어 호남 문화에 큰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 확신한다. 주말에 나주 정미소 작은미술관에 한 번 들러보시라. 붉은 벽돌이 품은 100년의 이야기와 예술이 된 일상의 풍경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가슴 뿌듯한 경험이 될 것임을 약속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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