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식

하늘 아래 나 혼자
우뚝 여기 서 있노라

더없이 높고 크고 넉넉한 품으로
우리를 굽어살피던
무등이 오늘은 두꺼운 솜이불을 덮고
깊은 잠에 들어 계신다

-용서하라
용서하라
저 강점기 광주학생 항일운동에서
1980년 5·18 민주항쟁까지
눈 부릅뜨고 지켜본 아픔이며 슬픔
가슴 깊이 타오르는 노여움의 불꽃
-나 흰 눈으로 온몸을 감싸리니
-용서하라
용서하라
겨울 무등이 말씀하신다.
(시화집 ‘시와 그림이 함께하는 예술여행’, 우전 컬렉션, 2023)

[시의 눈]

김준오 화백의 유채화 ‘눈에 묻힌 무등산’은 거대한 설인의 묵상을 만나게 한다. 아니면 웅장한 한 마리 흰 곰이 웅크리고 엎드려 사색하는 형상을 연상케 한다. 고적하면서도 은밀히 볼록볼록 숨 쉬는 겨울의 하얀 생명체 앞에 압도당한다. 토끼등-중머리재-장불재-입석대-서석대-인왕봉, 지왕봉, 천왕봉으로 이어 달리는 하얀 동화의 세계, 크고 넉넉한 숨결이 찬 기운 몰아내며 품 안에 감싸준다. 서석대, 입석대 부근의 주상절리는 하얀 눈꽃으로 뒤덮인 심오한 설원의 바닷속이다. 이윽고 상고대가 자욱히 피어난 고지대 풍경은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다. 파란 하늘과 대비된 눈에 덮힌 무등의 능선은 순백의 설경이 연출한 선명하고 감동적인 색감의 또 다른 예술이다. 동천(冬天) 아래 슬며시 무등이 꺼내놓은 것은 오월의 기억이다. 무덥고 절박했던 9일간, 사방으로 포위된 도시는 고립무원이었다. 조여오는 중압갑으로 질식할 것 같은. 도시는 똘똘 뭉쳤다. 강압적 폭력에 맞서 스스로를 지키고자 했다. 진실은 왜곡되고, 위증하기 바빴기에 홀로 뚫고 나아가야 했다. 무등 만이 믿음이었다. 푸른 잎새 스치는 바람결에 귀를 씻으며 산은 다져온 함성을 풀어 증언했다. 때가 되면 용서하라 말씀하신다. <윤삼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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