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대명천지에 노예라니

‘정의의 도시 광주’ ‘낭만의 섬 전남’ 이미지가 최근 많이 망가지고 있다. 정의 평화도시 광주시청은 최근 네 번이나 검찰 압수수색을 당했고, 맛과 인심 때문에 새 관광지로 떠오른 전남 섬은 섬노예 사건으로 인권유린의 무지막지한 ‘노예 섬’이 되었다.

지역의 좋은 이미지를 만드는데는 엄청난 시간과 돈이 들지만 한번 망가지면 회복하기 어렵다. ‘염전노예사건’을 계기로 ‘일간베스트 저장소’에는 다시 전라도 비하가 난무한다. 일베 회원들은 이번 사건 이후 각종 억측을 내놓으며 전라도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고 있다. 일베 게시판을 보면 서울 구로경찰서의 ‘염전노예’ 사건 발표 이후 전라도 비하 글이 급격하게 증가, 7만여건을 넘어서고 있다. 문제는 이번 사건과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점이다. 회원들은 ‘여수로 봉사활동가면 노예로 잡혀간다’ 등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또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와 더불어 원유유공자까지 생기는 것 아니냐’며 이번 사고와 무관한 5·18을 깎아내리고 있다.

무슨 일만 생기면 전라도를 폄훼하고 깍아내리려는 이런 비겁한 세력들의 농간도 문제지만 지역사회 내에 노예를 방치한 우리 책임도 크다. 이번 문제가 된 ‘신안노예’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2000년 6월. 40세 김모(시각장애 5급)씨는 카드빚을 지게 되자 부모님께 폐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에 집을 나왔다. 직장을 구하기는 힘들어 10여 년 동안 낮에는 막노동판을 전전하던 2012년 7월 노숙자 무료급식소에서 직업소개업자 이모(63)씨를 만났다. 이씨는 김씨에게 염전 일 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오랜 노숙생활에 지쳐있던 김씨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씨는 염전업주 홍모(48)씨에게 100만 원을 받고 김씨를 넘겼다. 홍씨는 김씨를 데리고 전남 신안군에 있는 외딴 섬으로 들어가 노예 부리듯 했다. 염전에는 김씨보다 먼저 일을 하고 있는 채모(48)씨가 있었다. 지적장애를 가진 채씨는 2008년 목포의 한 직업소개소에서 이씨 등에게 속아 섬으로 팔려 왔다. 두 사람은 지옥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여러 차례 탈출을 시도했으나 항상 실패했다. 탈출이 어려워지자 김씨는 도와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쓰고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지난달 13일 읍내에 이발을 하러 온 김씨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우체국에서 모친(66)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 십수 년 전 연락이 끊긴 아들에게서 편지를 받은 모친은 구로경찰서로 달려갔다. 지난달 24일 소금구매업자로 위장해 섬에 들어간 경찰은 일을 하고 있던 김씨를 구출했다.

‘염전 노예’ 사건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4년에는 다섯 살 때 섬으로 유인된 어린이가 44년간 노예생활을 한 뒤 50세도 안된 나이에 70살 노인보다 더 늙은 행색으로 나타나 충격을 주었고, 그 2년 뒤에도 신안군 섬에서 장애수당과 지원금을 빼앗기고 매 맞으며 노예생활 하는 사람의 얘기가 보도됐다. 장애인과 노숙자 들을 새우잡이 배와 염전에 조직적으로 공급한 브로커 검거 기사는 수시로 나왔다. 하지만 그때마다 현지 경찰 등 관계기관만 반짝 움직였을 뿐 대대적인 단속과 재발 방지 대책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동안 우리 지역사회는 뭘 했나. ‘섬노예’ 존재 사실을 알면서도 회피한건 아닌가. 사람을 짐승처럼 취급하는 노예상이 전라도 섬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남의 일로 치부한 건 아닌가. 관심이 없으니 이웃들도 노예를 돕지 않았을 것이다. 지역사회는 이번 사건을 치욕스럽게 느껴야 한다. 섬노예들이 돌을 던지면 닿을 거리에 파출소가 있었는데도 이들이 그곳에 도와달라는 요청을 하지 않은 이유가 뭐겠는가. 전남도와 지방노동청 역시 깜깜이였다.

6·4지방선거에 나선 전남도지사 후보는 이 문제에 적극 관심을 갖고 ‘섬 노예 근절 대책’을 공약으로 내놓아야 한다. 지역 경찰과 행정기관도 인권침해 현장을 왜 조기 발견하지 못했는지 철저히 분석하고 촘촘히 감시망을 다시 구축해야 한다. 싼값에 노동력을 쓰려는 지역 토호와 이를 비호하는 지역 경찰, 공무원 사이에 침묵의 카르텔이 있었다면 이 역시 발본색원 척결해야 한다.

21세기 대한민국에 노예가 웬 말인가. 정의로운 광주·전남에서 사회적 약자를 이렇게 짓밟고 천박한 인권의식을 드러낸 점, 깊이 반성해야 한다.

광주시장 전남도지사 출마자들은 지역의 새 아젠다를 설정하면서 ‘전라도다움의 회복’ ‘인권· 평화로 대표되는 남도정신의 복원’에 대해 철저히 고민해야 한다. /주필·이사 nam48@kj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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