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량역 앞에선 필자.

화순역을 출발한 용산발 순천행 열차는 오후 2시20분 능주역에 진입했다. 8칸의 객차를 매달고 열차가 서서히 플래폼으로 들어오자 역무원이 수신호로 안전을 확인한다. 열차가 플래폼에 완전히 멈추고 문이 열렸다. 그러나 객실 승무원이 잠시 내렸을 뿐 승객은 한명도 내리거나 타지 않았다. 열차 안에도 칸마다 고작 서너명이 앉아 있어 썰렁해보였다.

속도경쟁 시대에 경전선 완행열차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코로나19 여파로 여행객이 대폭 줄어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승객이 너무 적은 게 사실이다. 농촌인구가 급격히 줄고 도로가 시골 구석구석까지 뚫리면서 승용차 이용이 보편화된 결과다.

능주역은 1인 역으로 3명이 교대로 근무한다. 역무원이 하는 일은 크게 관제업무와 승객서비스 업무로 나뉜다. 취재차 방문했던 날 선로에는 일꾼들이 예초기와 분무기를 이용해 잡풀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에는 역무원 성창우(55)씨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원래 상주하는 곳은 광주송정역인데 이날 근무자가 휴가를 내는 바람에 대신 당번을 서는 중이었다. 근무복차림에 웃는 낯으로 반갑게 맞아주는 그의 첫인상이 선하게 느껴졌다. 근무 중 특별한 경험을 묻자 “어느날 장애인 승객이 열차 출발시각이 임박해 도움을 요청해 직접 업고 뛰어가 가까스로 열차에 탑승시켰던 순간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열차는 이양역을 향해 느릿느릿 움직였다. 예전에는 그 사이에 석정리역, 만수역이 있었으나 모두 사라지고 철길만 들판을 흘러간다. 이양역 역시 무인역으로 관리되고 있다. 이양역 다음에는 아주 작은 도림역이 있었다. 앙증맞은 역사와 단풍나무 아래 벤치가 엽서사진처럼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러나 추억 모퉁이에 인화된 풍경은 온데간데 없고 비닐하우스가 덩그러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고요한 능주역 플랫폼과 철로 화순 능주역은 90년대까지만 해도 역 대합실에는 열차를 기다리는 승객들로 늘 북적거렸으나 지금은 역무원과 간간이 역사를 구경하려 찾아온 여행자만 모습을 보이며 한산하기만 하다. 사진은 서울 용산발 순천행 무궁화호 완행열차가 기적소리를 울리며 능주역 플래폼으로 들어오고 있는 모습. /김영근 기자

이곳은 장흥과 보성으로 길이 갈린다. 외갓집은 장흥으로 가는 길 중간 ‘생이’라는 마을에 있었다.

도림역에서 신라시대 창건된 쌍봉사와 구한말 의병전적지 쌍산의소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쌍봉사 입구로 들어서자 양회일 의병장이 살았던 쌍봉마을이 나온다. 양회일은 1907년 1월19일 격고문을 발표하고, 가재를 전당잡혀 2천여원을 마련해 일가들과 하인들 그리고 동지들을 규합해 의병을 일으켰다.

쌍산의소 의병은 계당산에 마을주민들을 동원해 의병성을 쌓고 막사를 지어 군영을 구축했다. 그리고 유황굴에서 화약을 제조하고 대장간에서 철을 주조해 무기를 만들어 장기적인 항전채비를 갖췄다. 쌍산의소 막사에서 200여명의 의병이 생활하며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양회일부대는 그해 3월9일 능주로 진격해 군청과 헌병분견소 및 세무서를 습격해 무기를 노획하고 왜인의 집에 불을 질렀다. 또한 다음날 화순관아와 분견소를 습격해 전선을 끊고 건물을 불태웠으며 양총과 총탄을 노획하고 일진회원의 집에 불을 질렀다. 이어 3월11일 정오에 동복군청과 왜분파소를 습격한 후 광주로 향하다 경계지점인 도마산(도마치)에서 적의 추격을 받아 대장 정세현이 죽고 양회일, 임창모, 이백래, 안찬재, 유태경, 신태환 등 6명이 체포됐다. 이들은 재판을 받아 양회일, 임창모는 15년의 유배형에, 이백래, 안찬재 등은 10년의 유배형을 받아 지도에서 지내다가 1907년 12월에 순종 즉위 은사로 석방됐다.

100여년이 흐른 계당산 막사터는 돌무더기가 고스란히 남아 당시 이곳에서 항전의지를 불태웠던 의병들의 훈련모습이 활동사진처럼 스쳐갔다. 그리고 전투를 떠나기 전 결의를 다진 만세바위는 금방이라도 의병이 뛰쳐나와 출전채비를 갖출 것 같은 연상을 불러일으켰다. 막사터를 둘러본 후 산길을 따라 의병마을로 향했다.

산길 중간쯤에 의병들이 유황을 묻어두었던 유황굴이 나왔다. 움푹 패인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어 당시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다시 산길을 따라 내려가자 증동 의병마을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임노복의 생가를 비롯 군량미 저장소와 철을 만들어 무기를 제작했던 대장간이 있었다. 마을옆 산기슭에 자리한 대장간에는 아직도 제철슬러지가 남아 있어 무기제작이 실제 이뤄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도림역을 무심코 스쳐간 기차는 산길을 굽이굽이 휘저으며 달리다 터널을 지나자 명봉역에 도착했다. 명봉역은 문정희 시인의 고향 문덕면과 가깝고 역구내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명봉역과 보성역을 지나 득량역에 내렸다. 플래폼에 열차가 떠나고 나자 관광객들이 역무원 복장을 입고 선로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역사안에 들어서니 시간이 멈춰선 듯 오래된 물건들이 진열돼 작은 역사박물관을 방불케 한다.

득량역 ‘추억의 거리’ 득량역 주변에는 문방구, 이발관, 대포집, 다방, 전파사 등 7080 ‘추억의거리’가 꾸며져 있어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역 주변에는 문방구, 이발관, 대포집, 다방, 전파사 등 7080 ‘추억의거리’가 꾸며져 있어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가장 먼저 가게 간판의 문구가 눈길을 끈다. ‘내가 득량역에 온 것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득량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가 어린 곳이다. 득량(得糧)이란 지명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득량면 비봉리 선소앞섬에서 왜군과 대치하던 중 식량이 떨어지자 선소에서 식량을 조달해 왜군을 물리쳤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득량뿐 아니라 전남 남해안 곳곳이 조선수군의 이동경로여서 전남도가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 재건로’라는 명칭으로 역사스토리 테마길로 조성했다.

이용욱 고택 전경 득량면 강골마을에 자리한 이용욱 가옥은 계단식 3단 배치로 이뤄진 고택으로서 고관대작의 대궐처럼 웅장한 면모를 느끼게 한다.

추억의거리 인근 득량반점에 들러 짜장면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허기진 탓인지 가느다란 수타면에 버무러진 짜장면 맛이 예사롭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후 주인 조사훈(53)씨에게 추억의거리 이외에 가볼만한 곳이 없느냐고 물으니 가까운 강골마을에 오래된 종가집 고택이 있다며 직접 차로 안내하겠다고 한다. 채 10분도 안되는 곳에 이용욱 고택이 있었다. 우뚝 솟은 대문앞에는 아름드리 거목과 아담한 연못이 한 여름 시원한 풍경을 연출했다. 커다란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중년의 종부가 반갑게 맞아준다. 계단식 3단 배치로 이뤄진 고택은 고관대작의 대궐처럼 웅장한 면모를 느끼게 했다. 종부는 고택의 유래에서부터 400년 전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온 조상들의 이야기를 소상히 들려준다.

고택을 나와 뒷산 자락에 자리한 열화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돌담을 지나 탱자울타리를 거쳐 오르는 길에 고적한 숲길이 마음에 아늑한 느낌을 준다. 돌담으로 둘러쳐진 정자는 단아한 모습으로 길손을 반긴다. 대문을 들어서니 정면에 높다란 정자가 서있고 그 아래에 네모난 연못이 푸른 기운을 내뿜고 있다. 비에 젖은 감나무에서 간혹 어린 감이 떨어지며 정적을 깨뜨린다.

마루에 앉아 운치에 취해 감상하고 있는데 조성에서 왔다는 중년의 이씨 자매가 인기척을 낸다. 그 중 동생은 벌교상고 시절 조성에서 벌교까지 매일 기차로 통학을 했다고 한다. 상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취업해 상경했다는 그녀는 2년전 칠순이 넘어 다시 고향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들은 종가 고택의 집안내력은 물론 강골마을을 꿰뚫고 있었다. “이중재 의원과 그의 아들 이종구 의원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줬다. 이어 “경전선이 전철화 되더라도 조성, 득량역은 계속 존치될 것”이라며 안도하는 모습이다.

득량역까지 취재를 마치고 느낀 점은 ‘기차는 빠른 문명의 속도에 반응하며 변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추억의 힘에 의지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역전은 여전히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박준수 기자(시인)


[인터뷰] 문정희 시인 “명봉역은 첫 사랑 같은 설렘이 깃든 곳”
“경전선 철길 느린 대로 놔두었으면…”

문정희 시인이 명봉역에 세워진 자신의 시비 ‘명봉역’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명봉역에는 모녀 조각상을 닮은 아담한 시비가 세워져 있다. ‘한계령을 위한 연가’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문정희(74) 시인의 시 ‘명봉역’이다. 진도 출신 서예가 박춘우씨의 정감어린 글씨를 빌어 하얀 대리석에 박혀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서울에 살고 있는 문정희 시인과 직접 만나지 못하고 전화로 인터뷰를 가졌다.

문정희 시인의 고향은 보성 노동면 학동리다. 명봉역으로부터 불과 10분 거리에 있어 어려서부터 기차의 기적소리를 가까이 들을 수 있었다. 유년 시절 처음 본 열차는 ‘미카’라는 글씨가 새겨진 증기기관차였다. 이어 초등학교 5학년 때 광주로 올라와 살면서 주말이나 방학 때가 되면 명봉역에서 내려 고향집까지 걸어갔다.

광주행 기차를 타러 역으로 가는 길에는 늘 어머니가 동행했다. 그 때마다 어머니는 보따리에 일용할 양식들을 한 아름 싸서 들려주시곤 했다. 전남여중을 다니다 서울로 전학할 때까지 그렇게 어머니와의 추억이 차곡차곡 쌓였다. 그렇게 명봉역은 문 시인에게 유랑의 시발점이 된 곳이다.

또한 문 시인에게 명봉역은 외부 세계와 접속하는 출구였다. 그곳은 마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롭고 신비한 문명들을 만날 수 있도록 했다. 역 주변은 면사무소와 파출소, 이발관 등 근대문물이 몰려 있었다. 또한 인근에 금광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광경은 이발소 풍경이었다. 일본풍의 오래된 가죽의자와 집기들, 그리고 빨강파랑 유리병에 담긴 미안수(美顔水)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기억은 오랫동안 남아 있다가 지난해 일본에서 다시 조우하게 된다.

명봉역은 고즈넉한 옛 것을 품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어두운 기억의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문 시인은 고령으로 위태로운 상황을 맞은 할머니의 운명을 묻기 위해 어머니가 찾아간 ‘영험한 점쟁이 노파’로부터 “회생하지 못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슬픔’의 동의어가 ‘회생하지 못한다’는 것임을 알게 됐다. 열네살 때 작고하신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초상처럼 남아 있는 곳도 바로 명봉역이다.

50대에 쓴 이 시 구절 가운데 ‘눈 앞에 빙판길 미리 알고’ 부분이 아버지의 딸에 대한 걱정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머잖아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을 직감한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딸을 배웅하면서 안부를 당부한 말씀이 귓전에 맴돈다.

문 시인은 “명봉역은 첫 사랑 같은 설렘이 깃든 곳”이라며 “새로운 것을 예찬하는 시대이지만 느린 것은 느린 대로 놔두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새로운 선로가 생기더라도 일본의 녹색열차(green line)처럼 계속 남아서 우거진 숲 속에 새가 우는 느린 경전선 철길이 존속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디지털 뉴스 콘텐츠 이용규칙보기